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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69-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신명기 25:5-16

오늘 본문도 각기 다른 3가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하나는 계대 결혼을 거절한 자에 대한 지침이고요.
두 번째는, 싸움이 일었을 때 대항하는 행동에 관한 것이죠.

오늘도 역시 과한 표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계대 결혼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 결혼을 거부하는 자에게 모욕을 주는 일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죠.
남편들이 싸움이 일었을 때 아내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싸우는 남편을 돕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죠.
그런데 상대방의 음낭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거죠.
더욱이 그럴 경우 손을 자르라고까지 합니다.
지금 급하고, 격한데 어딘들 못 잡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상대방의 가장 치명적은 부분이면 더욱 좋겠죠.
그런데 마치 여자만, 유독 한 부분만 처벌을 받는 것이,
그것도 너무 극단적인 처벌이 이해하기 힘들게 합니다.

오늘도 역시, 의도와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죠.
이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의미는 같다고 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계대 결혼은 결혼 풍속의 원칙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의지할 데 없는 과부, 일단 과부가 된 것 자체가
사회적 편견과 소외에 처하는 것인데요.
후사마저 없어 의지할 데라고는 아무도 없는 처지가 되면,
그녀를 돌볼 사람이 없어지죠.
성경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대표해서 늘 고아와 과부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들을 구제하고 돌볼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 없는 과부는 저주받은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죠.
남편을 여윈 여인에게 위로와 공감보다는
남편 잡아먹은 여자라는 오명이 씌워지기에 십상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이기도 하죠.

싸움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지만
싸움이 일어날지라도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면 안 된다는 거죠.
즉 생명을 앗아갈 목적으로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성에게 음낭은 죽음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비록 싸움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죽일 목적을 드러내며 싸우지 말라는 뜻이죠.

이 두 이야기에서 흐르는 의미는,
생명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최소한의 배려와 존중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죠.

한 가지 더 이야기가 있는 데요.
주머니에 저울추 두 개를 갖지 말라는 이야기는,
서로 다른 기준과 법을 적용하지 말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당시는 무게를 달 때, 돌로 만든 저울추를 사용했는데요.
이것으로 기준 삼아 질량을 측량했습니다.
이 표현은 부정직한 모습을 버리라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어쩌면 오늘 세 가지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이 여인도 누군가에게는 귀하고 소중한 아내였다.”
“이 남성도 누군가에게는 귀하고 소중한 남편이다.”
“속임수와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내 가족, 내 이웃일 수도 있다.”

구약을 잘못 읽으면 모든 것이 죄인에 대한 응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읽으면,
모든 것이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보이죠.
우리에게 규율과 율법이 있는 이유는 이웃에 대한 배려 때문입니다.
법에서 정한 범법자들을 향한 단죄는,
그들을 정죄하고 복수하는 목적이 아니라
다시는 이웃에 대한, 생명에 대한 박해나 비하가 없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결승선이 아닙니다.
율법은 출발선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디디고 올라서는 것이죠.
법을 지킨다고 신앙인이 아닙니다.
고난주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마음에 이스카리옷 유다와 다르지 않은 배신의 마음이 있고,
우리의 마음에 대제사장과 같은 시기심이 있으며,
우리의 마음에 남이야 어떻든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마음이 넘칩니다.
그럼에도 들키지 않았고, 그럼에도 가려졌다 해서 우리가 준법자는 결코 아니죠.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준법은 사랑까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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