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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73- 요단강에서 여러분의 올무를 버리세요. 신명기 27:11-26

어제 본문에서부터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을 건넌 뒤에”라는 말인데요.
2,3,4, 그리고 12절까지 연속해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구원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과정이죠.
그 가운데 주목할 2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광야와 가나안인데요.
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미 여러 차례 광야와 가나안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광야를 괴로움과 고통으로 생각해 왔고,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인식은 잘못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광야처럼 편한 곳이 없습니다.
먹고 마실 것을 주셨고, 가는 길 또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죠.
반면 가나안은 어떨까요?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일을 해야 했고,
전쟁을 통해 정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인식과 정반대인지도 모르죠.

중요한 것은 이 두 과정이 구원의 역사에서 꼭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과정은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죠.
저의 언어로 이 과정을 설명하자면,
광야는 겸손히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과정입니다.
순종의 시간이고, 나를 버리는 시간이죠.
예배가 그렇고, 말씀 앞에 설 때가 그렇습니다.
이 과정은 매일매일 필요하고, 순간순간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나의 지식도, 경험도, 논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묵상의 시간이 그렇습니다.
심지어 나의 상식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광야에서 죽었구나 싶을 때 살리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은 목격하죠.
나의 상식도 뛰어넘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으로 제한을 두는 버릇을 버려야 하죠.
“나는 안 돼!” “나는 여기까지야!”를,
“그러나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어”로 바꾸는 과정이죠.
곧, 믿음의 과정입니다.

반면, 가나안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그 믿음을 가지고 실천하며 사는 곳이죠.
나의 신앙과 변화된 생각을 실현해 내는 곳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싸워야 하고,
수많은 공격과 태클 가운데서도 버티고 견디며 지키고 나가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려야 하고요.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며 살아야 하죠.
이는 마치
아침에 주신 묵상을 오늘 삶의 자리에서 실현해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과정의 시작이 묘하게도 같습니다.
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로 들어갈 때 홍해를 건너죠.
이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는 어떨까요?
요단강을 건넙니다.
우리는 홍해에 대해 강한 인상이 있어서
요단강을 건너는 방법에 대해 잊고 있는데요.
요단강 또한 홍해와 마찬가지로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이 두 과정의 시작이 강을 건너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강을 건넌다는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세례”라고 부르죠.
이스라엘에게는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본 어게인(born again)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어둠의 자녀에서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사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얼굴도, 피도, 성품도, 성격도, 스타일도 변하지 않죠.
이는 단지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으나 이제는 그 죄가 다 사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는 의미이고요.
이것이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문제는 죄가 사해졌다고 우리의 태도 또한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용서받았다고 그것이 곧 나를 정결케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죄가 사해짐은 은혜이지만
그 은혜로 인해 나의 삶이 죄가 없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거죠.
한 번 더 세례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나의 삶의 태도를 버리는 세례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세력은 결코 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좌지우지하지 못해요.
그들은 겁박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를 위해 하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겁박이 통하고, 그들의 힘이 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나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유혹 거리, 그들의 공격 거리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가령, 곁에서 이렇게 외치죠.
“그렇게 살면 가난해질 거야~”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
그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 안에 가난해지면 안 될 것 같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속삭임에 내가 반응합니다.

요단강은 그런 나의 마음을 주님께 맡기는 과정이죠.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부자로 살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그런데 반대로 가난하게 살 자유도 있습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죠.
부자로 살아갈 마음은 자유라고 하면서
가난하게 되는 것은 저주라고 여기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 4: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부유하기를 원하죠.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당연한 마음이고,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것이 있죠.
“부유해도, 가난해도 나는 괜찮아.. 그래도 부유해지고 싶어”라는 마음과,
“절대 가난해질 수는 없어. 그것은 최악이야. 오직 부유해지기만을 원해”라는 마음은 완전히 다르죠.
하나는 꿈이 될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올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은 꾸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올무에 걸리는 생각은 버려야 해요.
요단강에서 여러분의 올무를 버리세요.
오히려 요단강에서 여러분의 꿈을 세우세요.
주님의 뜻대로 살면 가난해질 것이라는 올무도 버리세요.
주님 뜻대로 살면서도 자유하고 풍부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꿈을 꾸세요.
그런 요단강을 건너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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