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75 - 축복은 저주의 자리에서 빛납니다. 신명기 28:15-24

빛과 어두움은 하나입니다.
두 객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빛이 있으면 빛인 것이고, 빛이 없으면 어둠인 겁니다.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설명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죠.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시죠.
빛이신 하나님과 어둠의 권세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어둠의 권세가 왕 노릇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거죠.

어제 묵상한 베라카는 ‘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요.
그것이 신기하게도 정반대의 개념인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베라카에는 복과 저주가 동시에 있는 셈이죠.

이미 우리는 신명기를 통해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심산과 에발산으로 나눠 사람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말씀하시고 ‘아멘’하도록 하시죠.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도 기억하시죠?
그것을 야곱의 축복이라고 흔히 말하는데요.
잘 읽어보면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입니다.
이렇듯 축복에는 다른 개념인 저주가 내포되어 있죠.
왜 그러셨을까요?

오늘도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말씀이 쏟아집니다.
어떤 학자가 토라, 그러니까 모세오경을 분석했는데요.
거기에는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라”는 긍정적인 명령의 계명이 248개이고,
“하지 말라”의 부정적인 명령은 365개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인간의 뼈마디가 248개라는 둥,
365일 매일같이 자신을 지키라는 말씀이라는 둥 설명합니다만
저는 그런 의미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말씀에 서로 다른 두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죠.

우리의 삶에도 ‘하라’와 ‘하지 말라’가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긍정’과 ‘부정’이 존재하고요.
우리의 삶에도 ‘참’과 ‘거짓’이 존재해요.
그런데 그것을 가르는 방법, 그 둘 중에서 길을 찾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라’는 명령만 기억하고,
‘긍정’의 말씀만 붙들고,
‘참’된 길만 걸으면 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지키는 방법은 옳지 않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요.
긍정의 말씀을 붙드는 이유는 나를 부정적인 마음에서 해방시키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고 우리가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길을 걷는 것이 거짓으로부터의 유혹을 이기는 길이죠.

오늘도 선택하십시오.
여호수아가 한 말을 기억하시죠?
수 24: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어려움에 빠지고, 내 앞길이 막혀, 신앙이 흔들릴 때, 그때, 나는 주님을 선택하겠다”는 뜻입니다.
계속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죄를 묵상하지 마세요.
어려움을 묵상하지 마세요.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절망스러울 때 절망을 묵상한다고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이길 길은 하나입니다.
절망스러울수록, 이기고 싶다면 희망을 노래하세요.
아플수록, 이기고 싶다면 감사와 기쁨을 찬양하세요.
고통스러울수록, 이기고 싶다면 주신 복을 세어보세요.

축복은 저주의 자리에서 빛납니다.
사랑은 미움과 다툼, 시기와 질투의 자리에서 더 빛나고요.
소망은 절망의 자리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러니 쓰러진 그 자리에서 아래를 보지 말고, 눈을 들어 주를 보세요.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