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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 61 - 구별된 삶을 사십시오.(신명기 22:1-12)

어제도 그랬는데 오늘도 본문은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주제만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네요.
그렇다고 한 가지 주제에 맞춰 말씀드리기에는 오해할 만한 구절도 있네요.
이 짧은 본문에 각기 다른 주제가 5개나 됩니다.
일단 간단하게나마 각 주제의 요지를 설명드릴게요.

1. 1~4절까지입니다.
여기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뭘까요?
‘이웃’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웃을 의미하는 단어까지 합하면 7번 나와요.
그다음으로 많은 단어는 ‘못 본 체하지 말라’입니다.
3번이 반복되죠.
이를 합하면 ‘이웃을 못 본 체하지 말라’가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3가지 중요한 예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식사법인데요.
그들의 식사는 배를 채우는 의식이 아니라 교제하는 예법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길죠.
식사마다 한 2시간쯤 됩니다.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을 아시죠?
그런데 그 그림은 유대 예법에 의하면 잘못된 그림입니다.
그렇게 앉아서 식사를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법은 정결 예법이에요.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예식을 늘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자신이 깨끗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의식이 아닙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깨끗해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더러워지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더러워진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나 하나 때문에 공동체가 흐트러진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는 거죠.

세 번째 예법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마음을
어려서부터 행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만들어 주는 것이 저금통인데요.
그 저금통의 이름이 쩨다카입니다.
자선과 기부라는 뜻인데요.
자신의 용돈의 일부를 꼭 남을 구제하는 데 쓰는 것이죠.

이 말을 종합하면 유대인들의 예법에는 공동체성이 기본으로 깔려 있습니다.
공동체성에 기초한다는 것은
단순히 구제가 남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공동체의 나눔은 더불어 사는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2. 5절인데요.
이 구절이 논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남자 옷을 여자가 입지 말고, 여자 옷을 남자가 입지 말라는 말씀이죠.
마치 오늘날 유니섹스 시대를 질타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동성연애적인 시각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분들도 계시죠.
그런데 조금이라도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이런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남자의 의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의 본뜻은 ‘군장’입니다.
그러니까 군복이라는 뜻이죠.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여자는 군복을 입지 말라는 뜻입니다.
군복이란 전쟁과 전투를 의미하는 데요.
좀 넓은 의미로는 남자가 해야 할 역할(성차별적 의미가 아님을 밝힙니다)을 여자가 하지 말라는 뜻이죠.
반대로 여자의 의복이란 단어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가장 숭상되는 종교는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다산이란 많은 열매를 뜻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신이 여신입니다.
여자의 의복으로 표현된 신명기의 말씀은 바로 이 이방 신을 뜻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떤 동성애적 시각이라든지, 여장, 남장과는 하등 상관없는 본문입니다.

3. 6~7절입니다.
에고… 오늘은 설명할 것이 너무 많네요.
읽는 분들이 지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뜬금없이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이해가 힘든 이야기죠.
어미 새와 새끼 새가 있다면 어미 새는 보내고 새끼 새는 잡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뭔 소립니까?
연약한 새끼 새는 잡아먹어도 된다는 말씀일까요?
이 구절의 중심 단어는 새가 아니라 어떤 나무나 땅입니다.
어제 본문에도 나무에 달린 자라는 표현이 나왔죠?
이 구절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과 같은 표현이라고 말하면 너무 나간 걸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4. 8절입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라는 말씀이죠.
굳이 왜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야 하는지,
왜 지붕에 사람이 올라가는지 의아하실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집은 우리와 달라서 지붕이 평평합니다.
현대식 건물의 집처럼 옥상이 있는 거죠.
지붕이란 옥상을 말합니다.
옥상을 만든 이유는 그곳이 곧 교제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5. 9~12절입니다.
씨앗도, 동물도 섞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이 말씀은 구별된 삶을 살라는 말씀이죠.
재미있는 것은 12절인데요.
겉옷 네 귀퉁이에 술을 달라는 말씀이 있죠.
술은 옷에 다는 장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히브리어로 [치치트]에요.
히브리어 알파벳은 하나하나에 숫자가 있거든요.
그래서 이 단어를 숫자로 환산하면 613입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의 율법 계명이 613개입니다.
조금 알레고리칼한 해석이지만 율법을 몸에 달고 살라는 뜻이죠.
그렇게 구별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무 설명하느라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이 말씀에서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죠.
저는, 우리를 위해, 이웃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너희도 그리스도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라는 메시지를 읽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별된 존재입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못 본 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요.
이웃과 더불어, 공동체와 더불어 교제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구별된 그리스도인의 본분이죠.

내일은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이 주신 우리들의 공동체죠.
그 공동체를 못 본 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제함을 사명으로 여기시기 바라고요.
그렇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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