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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 60 - 지금의 자리에 순종해야 더 넓은 자리를 주십니다.(신명기 21:10-23)

오늘 본문은 각기 다른 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다르지만, 요점은 같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전쟁에 이겨 포로로 잡은 사람 중에 어여쁜 여인이 있습니다.
그를 보고 마음이 동해 그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면
포로의 의복을 벗기고,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회복케 한 이후,
결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전쟁의 승리자로서 강압적으로 여인을 취하지 말고,
인격적이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이죠.

다른 예가 있습니다.
아내가 둘이 있는데 그들이 같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먼저 나은 아들보다 나중 낳은 아들의 아내를 남편이 더 사랑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듯이, 마음이 가고, 끌리는 사람에게 우선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권리를, 비록 늦게 낳은 아들이지만
사랑하는 여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장자라는 것은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낳은 순서가 정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거죠.

마지막 이야기는 불효한 아들이 이야기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불효한 자식은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부모의 권위와, 자식의 순종이 유대인의 관습에서는 중요하죠.
하나님 또한 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십계명에도 적어 주셨습니다.
어쩌면 이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모형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불효한 자식은 돌로 쳐 죽이고, 나무에 매달아 본보기를 보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 적혀 있습니다.

각기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들에는 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먼저 이 이야기들을 들을 때 곱씹어 읽어야 합니다.
꼭 성경을 읽을 때 보면,
알아듣고, 따라야 하는 말씀은 쳐다보지도 않다가
곡해하면 안 되는 부분에는 눈을 크게 뜨고 마음에 새기는 이들이 있어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전쟁에 이기면 누구나 여인을 취해도 되는구나!’라고 읽으면 안 됩니다.
‘아내는 둘을 얻어도 되는구나!’ 이런 식으로 보면 안 돼요.
또, ‘불효한 아들은 소문을 내야 해’ 라거나
‘하나님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실 만큼 무자비하시구나!’ 이렇게 봐서도 안 됩니다.
이 이야기들은 하나의 예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뜻이죠.
전쟁을 해서 이겼다고,
정당하고 권리를 얻었다고 생명을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령, 승진해서 팀장이나 부장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상사이고, 부하들을 다루는 권리가 생기죠.
그렇다고 마음대로 해도 될까요?
부하들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부려도 될까요?
자기가 만든 회사라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될까요?

두 번째 이야기는,
아무리 내 마음에 끌려도 정해진 것을 바꿀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고요.
우리는 쉽게 마음대로 하잖아요.
힘 있는 사람들은 정해진 법들을 지키지 않잖아요.
요즘 취업비리들이 밝혀지고 있죠.
취업절차라는 것이 제출기한이 엄격하게 있고,
제출서류 또한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잖아요.
그러나 정해진 순서와 절차를 무시하고,
어떤 정치인의 딸은 다 늦게 종이 한 장으로 합격처리가 되었다죠.
그러면 어떨까요?
힘이 있어서, 잘 알아서, 서로 안면이 있어서
그래서 법이 있어도 마음대로 하면 안 되잖아요.

마지막 이야기 또한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가 불효한 아들은 죽이라는 메시지로 들리세요?
반대로 아들이라면 불효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아닐까요?
그러니까 아들들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메시지 말이죠.
‘나도 인격이고, 나도 뜻이 있는데 왜 아버지 말을 들어?’
맞습니다만 아들이니까, 그렇게 주어졌으니까,
우리는 그에 맞는 사명을 가져야 하죠.
나에게 주신 자리와 직책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니까요.

여기서 조금 재미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어야 할 텐데…)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는 형벌은 저주를 뜻하죠.
나무에 달리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는 어떨까요?
아마도 성경 상에 가장 불효자의 대명사가 바로 그 탕자일 테죠.
그가 집을 떠난 지 한참 되었으니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았을 겁니다.
그가 불효자라는 사실을 말이죠.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아버지에게 가장 큰 모독을 안겨 주었죠.
그런데 그가 집에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동네 사람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비추어보면 동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을까요?
아마도 동네 사람들이 보면 돌을 던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죠.
그렇다면…
왜 아버지가 매일 동구 밖 먼길까지 나와
아들을 기다렸는지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가 가장 먼저 아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요?
오늘 아침, 이 생각이 들자 제 코 끝이 시큰해졌습니다.
그러셨겠구나.. 싶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마세요.
자기 권리대로 살지 마세요.
새들은 하늘에서 살 때가 가장 새답고,
물고기들은 물에서 살 때가 가장 물고기답습니다.
그들이 자기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물속에서 날아다니지는 않습니다.
하늘에서 헤엄치지도 않죠.
각자 맡은 바 자리에서,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그 자리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듯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우리’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니까요.

지금의 자리에 순종해야 더 넓은 자리를 주십니다.
맡겨진 자리에 순종해야 더 큰 자리를 주시고요.
주어진 자리에 순종해야 더 성장합니다.
아들의 자리에서 순종해야 더 좋은 남편이 되고,
남편의 자리에서 순종해야 더 좋은 아버지가 되듯이 말입니다.
오늘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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