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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베드로전서묵상

정말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3-17 정말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작은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었죠.
중세시대 당시 라틴어는 배운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만이 익숙한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일반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조차 없었죠.
예배시간에도 목회자들은 성경을 라틴어로 읽었습니다.
회중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말이죠.
그리고는 성경에 대한 해석을 목회자들이 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들이 아니면 성경을 읽지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회자들 뜻대로, 그들 마음대로 성경이 전해졌습니다.

성경은 특별한 자,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모두가 읽고,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지식이 없어도,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말씀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영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 때문이죠.
주님을 향한 열망과 마음의 눈으로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눈을 밝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가끔은 다른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메시지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저는 꽤나 많은 질문들을 받곤 합니다.
그 많은 질문들을 모으면 2가지 정도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요.
하나는 상사나 권력자, 혹은 권세자들의 불의와 상관없이 복종해야 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본문이 무조건적인 순종을 가르치는 말이냐는 질문이죠.
많은 목회자들이 이 본문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해야 복 받는다는 의미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세시대 성경을 전유물로 여겨 자신의 유익대로 해석했던 목회자들처럼 말이죠.

성경묵상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을 혼자로 끝나면 안 됩니다.
묵상은 나눠야 합니다.
묵상을 나누는 이유는 서로의 은혜를 나눈다는 의미도 있지만
나의 묵상이 엇나가지 않도록, 나의 자의적 해석이 되지 않도록 도움을 받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묵상을 들으면서 나의 묵상을 수정하고 고쳐나갈 수 잇기 때문이고요.
또한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묵상을 혼자만 하지 마세요.
주신 은혜는 나누시고요.
다른 이들에게 주신 말씀도 꼭 들으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을 쓴 이유에 대한 배경설명이 조금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이 책을 쓸 당시,
기독교는 소아시아까지 퍼진 상태였습니다.
한마디로 불같이 번졌습니다.
많은 핍박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퍼져나갔습니다.
그런 와중에 스데반을 비롯한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고요.
박해자들은 그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기독교의 확산을 막고자 했겠지만
그 순교자들의 피는 오히려 기독교 전파의 화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초대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유행처럼 번진 것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순교에 대한 환상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순교의 준비'(praeparatio ad martyrium)라고 불렀는데요.
순교를 미덕화 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순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순교를 자처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순교하는 것이 지상 목표처럼 되어 버렸죠.
선교의 지상과제가 순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순교하려고 예수 믿는 것처럼 말이죠.

중국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 느낀 점인데요.
중국에 단기 선교사로 들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정착해 살지 않고, 며칠, 혹은 몇 달 사역하다 돌아가고, 다시 와서 사역하다 돌아가는 그런 분들이죠.
그런데 이 분들 가운데는 마치 중국에서 쫓겨나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사역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 자신이 중국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났다는 것을 선교의 자랑처럼 여기는 거죠.
그러다보니 그들은 중국에서 필요 없는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외국인이 중국 자국인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공개적으로 성경을 가르친다고 광고를 하거나, 심지어는 대로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고 전도지를 뿌리면서 전도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중국 당국의 제재를 받는 것은 불 보듯 뻔하고요.
그리고 추방이 되죠.
그것이 마치 자신의 목표처럼, 자랑처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제가 잘 아는 이유는,
이런 일이 있으면 현지에서 정착해 사는 선교사들이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죠.
그런 분들이 한 번 소동을 일으키면 중국당국은 그것을 빌미로 조용히 있는 선교사들 색출작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초대교회 당시 벌어진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이들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아무런 희생이 없이, 당시 사회구조 가운데 기독교가 자리잡기를 바랬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왕이나 권력자에게 순복하는 백성이 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권력자에게, 정권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잘못된 목표의식에 관한 경고의 메시지로 들어야 하죠.
가끔 열심히 가다보면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좋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다툼이 불가피합니다.
서로 다른 배경과 사상에서 자랐는데 어찌 쉽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다툼은 좋은 교제를 위한 과정인 거죠.
그런데 다투다보면 좋은 교제라는 목표를 잃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다툼이 목표가 되어버리죠.
그래서 좋은 교제는 잊어버리고 서로 단점을 찾아내는데 모든 정열을 쏟습니다.
선을 위해 길을 나섰다가 악을 행하는 것이죠.

이런 일들은 사역에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나눔과 도움을 주는 일들을 하다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 돕지만 고맙다는 소리 하나 못 들을 때 낙심이 되죠.
아니,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하는 것을 볼 때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합니다.
남을 도우려고 시작한 일이 남을 저주하는 일로 어느덧 변모해 버린 거죠.

우리는 길을 가다가 ‘정말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처음 마음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첫사랑은 잊지 않았는지,
타인을 위한 복음이 자신을 위한 자랑이 되지는 않았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아름다운 하루를 위해 지금 출발하시겠죠.
그러나 오늘 많은 일 가운데에서 여러분은 그 목표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중간 중간 여러분을 체크해 보시죠.
내가 정말 오늘을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말이죠.
많은 방해가 있고, 많은 태클이 와도 그 목표는 잃지 않으시길 빕니다.
그 방해에 훼방을 받고 그 태클에 걸려 넘어져도 다시 종전의 목적으로 돌아오는 하루이길 빕니다.
우리의 신앙은 종국에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품이 본래 우리의 목적지였으니까요.

사랑하는 아름다운주님의 공동체 여러분,
이번 한 주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지내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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