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베드로전서묵상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크고 놀라운 선교입니다

베드로전서 1:10-16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크고 놀라운 선교입니다.

창세기1장은 창조의 관한 내용입니다.
모든 만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특이점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만물들을 창조하실 때와는 달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밑그림을 그리셨는데요.
그러니까 미리 모델을 정하신 것이죠.
그 모델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이마고데이’(IMAGO DEI)라고 합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형상이 곧 하나님은 아닙니다.
내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내가 하나님은 아니라는 뜻이죠.
이는 내가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의 모델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죠.

우리 안의 죄는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의미하죠.

어디선가 읽은 예화가 생각납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실재했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어떤 화가가 예수님을 그리기 위해 모델을 정했답니다.
너무도 인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모델을 통해 잘 그려냈데요.
오랜 시간이 흘러 그 화가는 가룟유다도 그리고 싶었답니다.
가룟유다의 이미지를 떠올리다가 교도소를 찾아가게 되었답니다.
그곳에서 모델을 구했는데요.
살기 등등한 눈빛에 깡마른 얼굴, 고뇌가 가득한 표정에서
가룟유다를 끄집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이제 모델에게 모델료를 지급하려고 하는데
모델로 섰던 그 죄수가 화가에게 말하더래요.
“선생님, 나를 모르시겠습니까?”
그 말에 화가는 그 모델을 뚫어지게 쳐다봤데요.
가만히 보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생각이 안 나더랍니다.
그 죄수가 말하기를,
“오래전 선생님의 모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를 통해 그린 그림은 예수님이었어요.”

어제는 중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는 사람이
치매에 걸린 90대 노인을 폭행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하는 노인을 상대로
간병인은 수시로 때리고, 발로 찼습니다.
심지어 발가락을 입에 넣기도 하고,
밥을 먹이다 숟가락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데요.
그 장면은 수상히 여긴 딸이 몰래 CCTV를 설치해서
모든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간병인이 간병인 역할을 못할 때 죄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의사가 의사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사장이 사장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때 죄가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의 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몸에 담고 태어난 존재가 우리입니다.
그런데 그 형상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질만이 죄가 아니고요.
우리의 창조 목적과 다르게 사는 것이 죄인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모델로 삼았다면
그의 전기나 자서전, 혹은 책들을 섭렵하겠죠?
아마도 그가 했던 일들은 모두 따라할테고요.
심지어는 그의 말투나 필체까지 따라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를 닮고 싶으니까요.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생각을 알고 싶으신가요?
주님의 계획과 뜻, 그가 꿈꾸는 나라에 대해서 알고 싶으신가요?
그가 베푼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알고 싶으신가요?
우리의 모습에서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선교는 다른 것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크고 놀라운 선교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