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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베드로전서묵상

내게 주어진 은혜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18-22 내게 주어진 은혜는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내용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에 보면
Descendit ad inferna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옥에 내려가셔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눈을 씻고 찾아 보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빠져있기 때문이죠.
이 구절이 많은 논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양교회들도 한동안 이 구절들이 사도신경에서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함께 이 구절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모든 교회들의 사도신경에 이 구절이 복원되었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한국교회만 이 구절이 사도신경에서 빠져있습니다.

이 구절의 근거가 되는 본문이 바로 오늘 묵상하는 본문입니다.
그 정도이니 이 본문이 얼마나 논란이 되겠습니까?
아침에 일어나 지금까지 저는 한 시간 동안을 고민했습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묵상해야 하나?
이 구절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많은 해석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는 나름의 신학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려면 아마도 하루 종일 이곳에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이 본문은 우리에게 글로 잘 알려져 있는 어떤 목사님도 이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주 무서운(?) 본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인 논란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겠습니다.
대신 세례에 대한 묵상을 나누겠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의식입니다.
지금은 간편하게 머리에 물을 붓는 식으로만 행하지만 과거에는 강과 같은 곳에서 온 몸을 다 넣었다가 빼는 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렇게 하셨죠.
물론 지금도 침례교단에서는 이 방식을 고수합니다.

이 세례의 의미는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죠.
인간은 물속에서는 살 수 없으니까요.
죽음에서 건져졌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노아시대 홍수 사건은 물로 인해 모든 죄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오직 노아의 가족만이 그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죠.
이것이 세례의 시작이라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의 이야기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는 물속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끝에서 시작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거듭났습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은혜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은혜와 구원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오늘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21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21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고요.
이 말은 'not only but also'의 문장입니다.
육체의 더러움을 씻을 뿐만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라는 뜻이죠.

중요한 것은 구원이 단순히 우리를 건져내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이죠.
우리가 구원된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살았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된 핵심적인 이유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단순히 ‘은혜 받았다’가 아니라 그 은혜를 ‘어떻게 누리며, 어떻게 나누며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용돈 받는 것이 목적이었죠.
그 용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용돈을 받으면 그 용돈은 준 사람과는 관계없는 내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쓰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벌어집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선교사로 사역하던 때, 어느 집사님이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찾아갔더니 시장에서 떡집을 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시장 떡집 안에 있는 방에서 살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두 사람이 누우면 공간이 없을 만큼 비좁은 방이었어요.
거기서 두 분이 봉투하나를 제게 주시는데요.
100만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돈은 그분들의 한 달 수입에 해당하는 큰 돈이더라고요.
제 손을 꼭 잡으시면서 선교에 보태라고 하시는데요.
그 큰 돈을 주시면서도 계속 죄송하다고, 미안하다고 하시는 것에요.
가장 큰 울림의 말씀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제게 맡겨서 미안하다는 말이었어요.
자신들이 선교해야 하는데 먹고 살기 바빠서 적은 돈만 쥐어 주는 것이 죄송하다고...

이제 그 돈, 제 돈이 되었으니 제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겠죠?
맛있는 것 사먹고, 이것저것 그동안 사고 싶었던 것 사고 하면 되겠죠?
뭐 어떻습니까?
이제 제 돈인데요.
다른 것이 타락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것이 타락이죠.
저는 그 돈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제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분들을 위해 제가 대신 집행하는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구원받은 때는 이제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갈라디아서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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