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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베드로전서묵상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베드로전서 4:7-11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지난 주일에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선한 행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선한 행동입니까?”
아마도 질문자는 베드로전서 묵상을 하면서 계속 언급되는 선한 행동이라는 말씀을 묵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에게는 알지만 그러나 모르는 말들이 많습니다.
문장에 어폐가 있죠?
말의 의미, 말의 뜻을 알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또 내가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말들이 많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생각으로 하면 다 이해를 하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적용하고 행동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말씀을 들으면 다 이해를 하고, 뜻을 파악합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인지 쉽게 압니다.
그래서 말은 잘하고, 약속도 잘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진정으로 그 말씀을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려고 하면 그때, 문제가 생기죠.
분명히 아는 말인데, 무슨 뜻인지 아는데, 머리로는 다 아는데 몸으로 하려고 하면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선한 행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분은 없을 거예요.
제가 질문하신 분도 선한 행동이 무엇인지 몰라서 묻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저는 이 질문을 하신 분이 존경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을 사람들이 잘 안하거든요.
다 아는 말이니까요.
너무 기초적인 질문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자가 질문을 하는 용기를 가진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삶으로 하고 싶으신 거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자는 말은 그리스도인들 누구나 합니다.
사랑하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어요.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사랑을 글자로 배웠기 때문이죠.

베드로는 이 서신에서 선한 행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한 행동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과, 또한 우리도 그 선한 행동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베드로는 선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구절은 8절입니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베드로전서의 핵심구절이기도 하죠.
이 구절의 내용에서 이해하기 힘든 구절은 없으실 겁니다.
사랑하라는 말과,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다는 말의 뜻은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머리로만 쉬운 말이지만 말입니다.
다만 덮는다는 말은 조금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허물을 덮는다는 말은 왠지 눈감아준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죠.
사랑하니까 못 본 척 해준다는 의미로 들리지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선한 행동으로 오해되기도 하죠.

그래서 이 ‘덮어준다’는 말은 약간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칼룹토]인데요.
이 말은 ‘수건’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수건으로 덮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죠.
마치 중동의 여인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원뜻은 단순한 덮음이 아니고요.
‘대속’(代贖 atonement redemption)의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대속이란 누군가를 대신하여 책임을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아무 이유 없이 욕을 먹거나 혹은 뺨을 맞았다고 가정해 보죠.
억울하고 분통터질 일이죠.
그런데 그 누군가를 용서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않고, 없던 일로 해 주기로 한 거죠.
그의 행동을 덮어줬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행동이 없어집니까?
내가 당한 모욕과 아픔이 없어지나요?
여러분이 하는 용서에는 그 모욕과 아픔이 담겨져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 모욕과 아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것을 용서하는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그 모욕과 아픔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죠.
그것이 용서예요.
용서에는 대속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죄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죄, 우리의 영혼에 새겨진 죄는 없어지지 않아요.
따라서 그 책임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죄의 책임을 자신이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거죠.
그 십자가가 대속이고요.
그 십자가가 선한 행동입니다.

우리교회는 주일공동체 예배 전에 예배를 위한 기도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꼭 하는 기도가 있죠.
예배에 참여할 이들을 위한 기도인데요.
어떤 마음으로 왔던지 간에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죠.
그런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참여한 사람들에게 은혜가 임하겠습니까?
우리는 중보기도도 하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합니다.
때론 구원을 위해, 때론 회복을 위해, 건강을 위해 기도하죠.
그런데 자신은 기도하지 않는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들어주시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이런 중보기도는 다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중보기도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기도하는 저의 믿음을 보시고 저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것이 대속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놓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의인논쟁이 있었습니다.
의인 10명만 있었어도 그 성은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인 10명이 무슨 힘이 있어서 부패한 성을 구하겠어요?
그것이 대속의 힘입니다.
그것이 중보의 힘이고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힘이죠.
그것이 사랑이고요.
그것이 선한 행동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많은 이웃들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여러분들이 사는 지역이 용서받기를 원하고요.
여러분들을 통해 이 나라가 변하기를 원합니다.
낮아짐을 통해, 용서를 통해, 사랑을 통해,
이 모든 '대속'을 통해 아름다운 변화를 보게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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