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197 - 진정한 복음은 문턱을 낮추고, 진실한 사랑은 식탁을 지킵니다.

2026. 5. 21.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반응형

사도행전 15:20~21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로부터 어느 도시에나 모세를 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의 글을 읽고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이틀 비가 내립니다. 30도를 육박하던 기온이 조금 내려가며 공기가 선선해졌습니다. 건조했던 날씨도 조금은 해소될 것 같습니다. 더위도 식히고 먼지도 씻어내는 반가운 비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마음은 촉촉해지고, 날카로운 생각은 부드러워지며, 지친 영혼은 다시 숨을 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촉촉한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하는 여러분을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실질적 지도자인 야고보의 선포가 끝납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처럼 되라는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랜 전통에 도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유대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사람의 은혜로 퍼져 나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색다른 중요성을 가집니다. 야고보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처럼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몇 가지를 삼가라고 권하죠. 그것은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입니다. 얼핏 보면 또 다른 율법처럼 보입니다. “결국 또 조건을 붙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뜻은 이방인들을 또 다른 규칙 안에 가두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공동체 식탁을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식사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음식에 대한 관습도 달랐고, 정결에 대한 기준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방인의 생활방식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의 율법적 습관은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서로 함께하기 위해 최소한의 배려를 요청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전통과 습관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한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공동체 식탁을 위해 자유를 조금 절제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한쪽만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조금씩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자유를 다 누리는 것이 능력이 아닙니다. 함께하기 위해 내 자유를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성숙입니다. 사랑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예요. 사랑은 상대가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존중은 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말하면서도 상대의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이죠.

교회는 사람을 자기 문화로 개종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복음도, 타인을 내 방식으로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특정한 예배 스타일, 특정한 말투, 특정한 옷차림, 특정한 정치 성향, 특정한 세대 문화에 맞춰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은 분명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거죠. 오늘로 말하면, 새로 온 사람이 기존 교회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를 당연한 듯 사용합니다. 형제, 자매, 직분 호칭 같은 말들이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송의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다닌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지만, 처음 온 사람에게는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어색함을 배려하기보다 “이게 맞는 것”이라고 강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문턱은 높아집니다.

우리는 본질을 위해 비본질은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려는 것은 교회 문화가 아닙니다. 내 취향도 아닙니다. 내 안에 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하나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익숙한 언어도 조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편한 방식을 조금 늦출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늘 번역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상대가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 밖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임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기보다 내 이야기만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길게 이야기합니다. 특정한 사람들만 아는 소재로 웃고 떠듭니다. 특정한 사람들만 즐기는 스포츠 이야기, 있는 사람들만 나눌 수 있는 소비 이야기, 나도 모르게 과시가 되는 취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유롭지만, 듣는 누군가는 식탁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죠.

나의 생각을 나누는 것은 자유입니다. 나의 취미와 습관을 드러내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묻습니다. 

“나는 내 자유를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술, 음식, 소비, 말투, 정치적 표현, 신앙적 확신, 예배 방식 같은 문제에서 우리는 쉽게 말합니다. “내가 맞다.” “나는 자유다.” 그러나 복음은 한 걸음 더 묻습니다. 

“내 행동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자유가 공동체의 식탁을 깨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전통을 절대화해서도 안 됩니다.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 신자들에게 소중한 신앙의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턱이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늘 교회의 전통도 그렇습니다. 전통은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걸러내는 장벽이 되면 복음의 정신을 잃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문턱을 낮추고, 진실한 사랑은 식탁을 지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초대가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로 이어지게 해야 합니다. 문턱은 낮아야 합니다. 그러나 식탁은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앉은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가진 자유를 사랑으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내 말이 누군가를 밀어내지는 않는지 살피십시오. 내 취향이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지는 않는지 돌아보십시오. 내 확신이 누군가에게 멍에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하십시오. 진정한 복음은 문턱을 낮춥니다. 진실한 사랑은 식탁을 지킵니다. 오늘도 낮은 문턱과 따뜻한 식탁을 만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https://youtu.be/IyQfYCNHGIg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