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160 - 여전히 우리는 귀한 자녀이고 쓸모있는 자산입니다.

2026. 4. 7.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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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13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건너갔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선한 바람과 부드러운 봄볕이 좋은 4월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계절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인한 4월이지만, 4월에는 죄가 없습니다. 오직 4월을 4월답게 만드는 내가 있을 뿐이죠. 아픈 기억과 슬픔조차도 오늘 우리에게 임하셔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 원하시는 주님의 따스한 위로가 우리와 함께하는 하루 되길 빕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바보, 즉 현재의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로 향합니다. 밤빌리아는 현재 튀르키예 남부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말합니다. 버가는 오늘날의 악수(Aksu)라는 내륙 도시죠. 그들이 굳이 배를 타고 버가로 향한 이유는, 그곳을 거점 삼아 소아시아 내륙 깊숙한 곳으로 복음을 들고 전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리더십이 조용히 바뀐 후에도 계속되던 전도 여행 중에 아주 당혹스러운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마가라 불리는 요한이 갑자기 전도 여행 일행에서 이탈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아무런 상의도 없는 일방적인 무단 이탈로 보입니다. 그가 이탈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요. 먼저 육체적인 연약함과 피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무려 120명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다락방을 가졌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 일행을 넉넉히 섬길 만큼 돈이 많았죠. 그런 요한이 평생 고생스러운 여행을 해 본 일이 있었을까요? 아마도 거친 산맥을 넘어야 하는 전도 여행의 험난한 일정을 육체적으로 견디기 몹시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육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어제 묵상했듯이 일행 안에는 리더십의 교체라는 아주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요한은 이 상황에 적잖은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에게 바나바는 혈육이자 자신이 깊이 존경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나바가 갑자기 굴러온 바울에게 리더십을 빼앗긴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바울의 사역 스타일은 부드러운 바나바와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바울은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죠. 온실 속 화초 같았던 요한에게는 그런 바울이 무척 거칠고 불편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런 복합적인 불만들이 그를 전도 여행에서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이 지점이 어제 묵상과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13절의 상반절과 하반절은 아주 극명한 대조를 이루죠. 늘 그래왔듯이 이렇게 인물과 상황을 대조하고 대비시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저자 누가의 탁월한 글쓰기 방식입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은 바나바의 사려 깊은 마음과 겸손에 비하면, 요한의 마음은 턱없이 좁아터진 셈이죠.

하지만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훌륭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점도 있지만 남에게 실망을 주는 나쁜 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늘 똑같이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렇게 두 가지 모습이 다 존재합니다. 은혜받고 잘하다가도 갑자기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어 집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를 정도로 우리에게는 지독한 이중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인간적 한계입니다. 정말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될 때가 훨씬 많죠. 나도 바나바처럼 넓은 마음으로 넉넉하게 살고 싶지만, 돌아서면 작은 일에 화가 나고 옹졸한 시기와 질투가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는 깊이 낙심합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스스로의 실망은 우리에게 아주 커다란 상처가 되죠.

그런데 여러분,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 그 연약한 인간적 한계를 매섭게 책망하려고 쓰인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훗날 바울과 마가의 관계는 이 사건 때문에 더 심하게 갈라섭니다. 깊은 갈등을 겪죠.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늙고 지친 바울의 가장 춥고 외로운 감옥 생활 마지막을 곁에서 지킨 사람이 바로 마가였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통해 놀라운 진리를 하나 깨닫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히고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 나타나도 하나님은 우리를 고쳐서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무단이탈자였던 요한은 훗날 예수님의 생애를 최초로 기록한 마가복음의 위대한 저자가 되죠.

우리가 알량한 자격지심에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은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우리를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부끄러운 연약함을 우리가 더 자라나는 성장의 도구로 쓰시죠. 요한의 놀라운 성장은 그의 뼈아픈 연약함 때문에 더욱 눈부시게 빛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한계는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욱 전진하게 만드는 거룩한 영적 불쏘시개입니다.

때로는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쓰라리게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도망쳐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에게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녀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가장 쓸모 있는 자산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연약한 한계를 너무 모질게 책망하지 마십시오. 한계가 있으니 그것을 믿음으로 넘어서는 기쁨도 있는 법입니다. 오늘 내가 마주한 그 초라한 한계가 훗날 나를 더욱 찬란하게 빛나게 해 줄 것을 굳게 믿으며, 주님 손을 잡고 다시 한번 힘차게 일어서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https://youtu.be/V7iTdRhNJ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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