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394 - 좋은 음식이 되어야 합니다.
2025. 9. 14. 12:55ㆍ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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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24:50~5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오늘은 [좋은 음식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2024년 3월부터 시작했던 누가복음서의 묵상 마지막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는 햇수로 2년, 매일 아침, 그리고 주일 공동체 예배를 합쳐 오늘까지 총 394편의 누가복음서의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는데요. 이 시간 동안, 같은 말씀 안에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동일한 음성을 듣고 함께 성장해 온 우리 모든 공동체 가족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 우리는 이 말씀의 능력을 완전히 깨닫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과 함께 지내온 여러분의 인생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는 다른 곳에 거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그렇습니다. 말씀은,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꼭 필요한 그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힘을 발휘하는 살아있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이게 놀라운 비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잃어버린 보물이기도 해요. 안 해도 티가 나지 않고 무시해도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작은 선택이 결과를 좌우하듯 우리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인생을 바꿉니다. 오늘도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려져 뿌리를 내리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 이제 누가복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함께 본문을 다시 한번 마음에 담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서 24:50~5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짧은 본문에서 어떤 구절, 어떤 단어가 가장 눈에 들어오셨습니까? 아마 어떤 분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축복’에, 또 어떤 분은 영광스러운 ‘승천’ 장면에 마음이 머무셨을 것입니다. 모두가 장엄하고 특별한 장면이죠.
그런데 저는 의외의 한 단어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바로 ‘베다니’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50절은 예수께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킬로미터, 감람산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저는 여기서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예수님은 마지막 축복과 승천의 장소로 예루살렘이 아닌, 굳이 베다니를 택하셨을까요? 왜 제자들을 그곳까지 데리고 가셔서 축복하셨을까요? 저는 이 지리적 선택 안에, 누가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왜 예루살렘을 피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어떤 곳으로 그려집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영광의 도시였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 내내 치열한 갈등과 논쟁, 배척과 암투가 끊이지 않았던 곳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가 있었고, 군중의 오해와 불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죠. 예루살렘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죠. 이는 종교적 분쟁이 치열하다는 뜻이죠. 분단과 분열, 전쟁과 대립의 표상이 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마지막 축복의 순간에, 바로 그 예루살렘을 등지고 떠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우리 삶의 자리에도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 있습니다. 갈등과 미움, 다툼과 경쟁,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자리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자리를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며 상처받고 소진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분쟁의 한복판이 아니라, 그곳을 떠나 주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자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길을 가려면 우리는 먼저 떠나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려면 과거를 떨쳐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 새로운 생각을 가지려면 이전에 가졌던 생각, 이전에 사로잡혔던 가치에서 떠나야 합니다. 새로운 습관을 만들려면 옛 습관을 버려야 하죠. 마음이 편하고 싶은가요? 그러면 미움을 버려야 합니다.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가요? 그러면 지난 실수와 실패를 떨쳐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지금의 자리를 떠나야 새로운 것을 얻습니다. 분열과 갈등, 깨진 마음을 딛고 일어서야 평안과 축복의 자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베다니였을까요? 먼저 베다니는 예수님께 ‘안식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서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대립이 극에 달하는 발단이 되었죠. 아마도 그날은 지칠 만큼 힘든 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작은 마을 베다니를 찾아 쉬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후에도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제자들과 성 밖으로 나가셨는데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베다니로 가셨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마도 그곳에는 특별히 쉴 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바로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사로와 그의 가족은 예수님을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세상의 어떤 조건이나 이해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로 맺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따뜻한 환대와 친밀한 사랑, 그리고 깊은 우정이 예수님을 그곳에서 쉬게 하였던 거죠.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자리가 바로 이 ‘베다니’와 같아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의 경쟁과 갈등에 지친 영혼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쉴 수 있는 곳,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을 열고 받아주는 따뜻한 환대가 있는 곳, 바로 그 자리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베다니는 ‘부활의 현장’이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인류를 향해 위대한 선포를 하셨죠.
요한복음서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단순한 마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생명의 능력이 선포된 바로 그 부활의 현장으로 데려가셔서 축복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필사적으로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셨던 것을 묵상한 바 있죠. 그들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시는 것을 묵상했어요. 그 말씀의 내용이 바로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메시지로 묵상했죠. 바로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우리의 앞에는 반드시 부활처럼 구원이 있음을,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이라고 말이죠.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9~10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낮은 사람 같으나 높은 사람이고, 시련을 당하는 자 같으나 그것으로 오히려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한 사람 같으나 결국 행복한 사람이고 없는 사람 같으나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는 사람이죠. 그것을 믿고 기쁨으로 사는 우리가 바로 주님이 꿈꾸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한 가지 더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는 장면이죠. 실용적인 계산을 앞세운 가룟 유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림으로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축복이 바로 이 순전한 사랑과 헌신이 있었던 장소에서 주어진다는 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적인 계산 위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사랑의 헌신’ 위에서 세워지고, 바로 그 터 위에 주님의 하늘 복이 흘러넘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신 마지막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메시지는 말이 아니었어요. 몸소 자리를 이동하시며 주시는 행동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라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을 베다니에서 예수님은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장면이 익숙하죠. 공동체 예배를 마칠 때 목회자는 손을 들어 축복의 기도를 합니다. 그 예식이 바로 이 본문을 바탕으로 정해진 예배 예식이죠.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이 왠지 얼마 전 묵상했던 엠마오의 제자들과 식사하실 때,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주셨던 장면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 또한 주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하셨던 모습과 동일하죠. 그때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시는 의미였어요. 그래서 빵은 곧 예수님의 육신이었고, 그 빵을 먹는 이들은 이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주님을 주인 삼은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했죠. 그런데 오늘 본문이 제게는 딱 그런 상황의 모습으로 비췄습니다. 다만 축복의 대상이 ‘빵’에서 ‘제자들’로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 본문은 [확장된 성만찬]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다시 말하면, 마지막 만찬이 빵을, 그러니까 예수님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장면이었다면, 오늘 본문은 제자들을 세상에 주시는 장면처럼 여겨졌다는 거죠. 찾아보니 그렇게 설교하거나, 해석하는 논문은 없더라고요. 물론 저의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름 신약성서 전공자로서 제가 논문을 쓴다면 이것을 주제로 쓰고 싶은 마음이 있을 만큼 저에게는 깊은 묵상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고 계시는구나!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신 이유는, 바로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이라는 뜻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주님의공동체 가족 여러분, 최근 뇌과학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음식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연료가 아니라 우리의 감정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따뜻한 음식 한 그릇은 우리의 가장 깊은 정서적 허기와 안정감에 대한 갈망을 채워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식탁 공동체’를 이루며 기쁨과 위로를 나누는 것입니다. 잊지 마세요. 가정에서의 식탁은 그저 배고픔을 채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식탁은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자리에요. 우리 자녀들에게는 정서와 영성이 자라는 시간이죠. 음식을 나누는 그 시간은 하나님께서 관계를 여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식탁을 잘 지키십시오. 가정에서 식탁 공동체를 잘 형성하기만 해도 가정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녀에게 뭘 잘해주는 것보다 식탁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잊지 마세요. 같이 음식을 나누세요. 자녀와 식탁을 함께 하세요. 그 식탁이 바로 예배입니다. 가능하면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하세요. 그게 부모의 특권이죠. 거기서 자녀들의 감정을 돌보는 능력이 나오니까요. 식탁이 무너지면 관계도 무너집니다. 식탁이 무너지면 교육도 무너져요.
예수께서 음식을 나누시고 먹는 식탁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사실은 모두 다 아실 겁니다. 이게 다른 것이 아니에요.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가르치고 감정을 나누는 데 가장 가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스스로를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빵처럼 축복하십니다. 이는 우리 또한 누군가를 위한 ‘좋은 음식’이 되어야 한다는 거룩한 사명으로의 초대죠.
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마지막 말씀은 바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좋은 음식’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갈등과 경쟁에 지친 이들이 언제든 찾아와 쉴 수 있는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부활의 희망을 보여주며, 어떤 계산이나 조건 없이 순전한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람.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며 기대하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런 ‘좋은 음식’이 되어 서로를 섬길 때, 그곳에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 하나님 나라의 식탁 공동체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귀한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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