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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83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요한일서 5:16~17   누구든지 어떤 교우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죽을죄는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두고 간구하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이죠. 나라를 잃었던 설움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유를 얻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그 감격과 기쁨을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죄로부터, 아픔과 근심, 걱정과 두려움, 신체적,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 정신적 올무에 묶여 고통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의 아픔을 아시고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도우시고 복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이 아침에 꿈꾸며 기대하는 우리 되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조금 뜬금없습니다. 그래서 어렵기도 해요. 갑자기 사도 요한은 죄의 문제를 꺼내 들죠. 맥락상 조금 튑니다. 게다가 죄를 죽을죄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로 구분까지 하죠. 죄가 다 죄이지 어찌 구분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 요한은 죄를 나누고 있죠.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내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사도 요한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를 굳이 구분한 이유, 그리고 그 구분이 죄인도 가능성이 있는 죄인과 가능성이 없는 죄인으로 나누죠. 그에게 가능성이 있는 죄인이란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죠.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인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전도에 초대교인들은 집중했죠. 그리고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졌죠. 그런데 가능성이 없는 죄인을 따로 나눈 것으로 보아 사도 요한은 콕 집어서 정죄하고 싶은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고 부활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들에 대해 분명한 선을 긋고자 지금 사도 요한은 무리하게 죄인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주신 말씀이 우리의 삶에 던져진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하죠. 저는 모든 이들이 죄인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문 앞에 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고 주어진 권리죠. 죄인이든 의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아이든, 모두가 차별 없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가리지 않으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구원의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문밖에서 주님이 문을 두드리셔도 그 문을 여는 손은 우리의 손이죠. 그 손이 주님의 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 손은 아무나의 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손이죠. 그것은 바로 '믿음의 손'입니다. 모든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그 가능성을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산혜진미를 차려놓아도 그것을 먹어 내 육신의 영양분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나의 손이죠. 자세한 이정표로 길을 안내해도 정작 그 길을 걷는 것은 믿음의 발입니다. 좋은 이야기, 좋은 소리, 좋은 가르침과 세상의 지혜를 얻을 말씀이 넘쳐도 정작 그 지혜가 나의 것이 될 방법은 오직 믿음의 귀를 가져야 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믿음이 없이는 가능성 없는 죄인 될 수밖에 없는 거죠. 결국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듣고 보고 경험하고 알아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해야만 나의 것이 되죠. 그래서 믿음이 없으면 죽을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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