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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79 - 믿는 사람은 내 안의 증거들이 많아집니다.

요한일서 5:9~10   우리가 사람의 증언도 받아들이거늘, 하나님의 증언은 더욱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그 증언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그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직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요. 오늘이 입추네요. 뜨거운 여름은 아직 식을 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는 압니다. 곧 가을이 오고, 또 곧 우리는 추워서 입에 김이 서리겠죠. 아마 그때는 또 춥다고 난리일 거예요. 오늘이 입추인 것을 달력을 통해 알게 된 순간, 저는 좀 웃음이 나왔어요. 곧 이 더위가 가라앉을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에게 여유가 생기는 때는 우리가 다가올 일을 확신할 때입니다. 곧 가을이 옴을 아는 사람은 지금 이 더위가 지나갈 것을 압니다. 이게 믿음이죠. 어쩌면 우리의 지금 어려운 시간도 지나가면 우리에게 추억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시간을 기쁘게 지나갈 수 있다면 말이죠. 믿음은 그렇게 기쁨과 짝을 이룹니다. 오늘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기쁘게 한걸음 내딛는 믿음의 하루 되시길 빕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임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 변증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그만큼 그 사실을 왜곡하고 믿지 않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더욱이 사도 요한은 그 변증의 초점에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심을 강조하고 있죠. 아시다시피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심을 부정하는 초대 기독교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성령과 함께 물의 세례를 강조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물과 피와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고 했죠. 굳이 3가지를 등장시킨 이유를 저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드랬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지금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우시고 주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일하시는 성령님이 그것입니다. 조금 억측이지만 그것이 성령, 피, 그리고 물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증언은 그것이 하나님의 증언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 연장으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증언을 설명하고 있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며 하늘의 음성이 들렸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마가복음서 1: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그 증언을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 속에 증언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마치 무엇인가를 믿는 데는 자신만의 경험, 혹은 확신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중요하게 다가왔습니다. 지난 주일 공동체예배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믿음이라는 소통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느낍니다. 이 또한 마치 신생아가 부모를 알아보는 것과 같죠.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가 진짜 부모인지 알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품을 알죠. 이것은 그저 생물학적 느낌을 넘어서 우리 안에 믿음이라는 영적인 체계가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만큼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느끼죠. 
 
이는 마치 본능처럼 우리 안에 증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신적인 갈망을 가지고 태어나죠. 수많은 철학자들은 우리 안에 절대자에 대한 인식이 타고 난다 했습니다. 바울도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죠.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삶 가운데 주님의 섭리하심을 느끼며 삽니다. 좋은 일에 감사할 줄 알고, 나쁜 일에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죠. 자연스레 믿음이 우리 안에서 작동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증거들을 쌓으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그 믿음의 증거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죠.

 

어린이들의 놀이인 보물 찾기가 그렇습니다. 곳곳에 보물을 숨겨 놓죠. 우리 어린이들은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지죠. 신기한 것은 지금 눈앞에 보물이 없는데도 그들은 보물이 있다고 믿고 찾는다는 거예요. 믿으면 찾게 됩니다. 그리고 찾으면 얻게 되죠. 반면 보물이 있다고 해도 안 믿는 이들이 있죠. 그들은 찾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얻지도 못하죠. 그들이 못 얻는 이유는 보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찾지 않아서입니다.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결국 작은 것 하나라도 찾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믿는 이들은 있는 것조차 차지하지 못하죠. 심지어 은혜를 입고도 그것이 은혜인지 모릅니다.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도 그것이 우연인 줄 알죠.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는 이와 모르는 이에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을 똑같이 받아도 어떤 이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니까요. 그들은 결국 전혀 다른 곳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있을까요?

 

믿는 사람은 내 안의 증거들이 많아집니다. 작은 감사가 쌓여서 큰 감사가 되고요. 작은 기쁨을 고백하면 그 기쁨들이 모여서 큰 기쁨이 됩니다. 반면 기쁨을 얻고도 그것이 기쁨인 줄 모르면 그 인생이야말로 비참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을지, 어떤 상급을 받을지, 또 어떤 기적과 같은 일이 내 앞에 펼쳐질지 모릅니다.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나를 휘감을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지금까지 받은 사랑만으로도 저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위험에서 살려주신 것, 나쁜 길에서 지켜주신 것, 악한 마음을 고쳐주신 것에서부터 좋은 공동체, 좋은 가족들 주신 것만으로도 갑절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마중물이죠. 

 

저는 믿습니다. 그 마중물을 드리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신다는 것을요. 그 증거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고백하는 감사는 차고 넘칠 것이며,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 속에 작은 증거들을 고백하며 사세요. 아침에 건강하게 눈을 뜬 것부터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에 이르기까지 그 작은 은혜들을 감사할 수 있다면,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가 누리는 기쁨들은 더 많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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