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요한일서묵상일기 73 - 세상의 모든 나쁜 일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강합니다.

요한일서 4:17~18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이 시간 말씀을 묵상하는 모든 이들 위에 충만하게 흘러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집요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으며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죠. 오늘은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그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죠. 바로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해지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우리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대로 우리가 살았다는 의미가 뭘까요? 수많은 본보기가 있고, 그분의 어록이 있고, 그분의 삶이 있지만 차치하고 커다란 틀에서 바라보면 어떨까요? 시쳇말로 예수님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는 중심에 계시죠. 지금까지 하나님 말씀의 중심에 섰던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말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 측면에서 어떤 것이 다를까요?

 

유대교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해석하기도 힘들죠. 그런데 큰 틀에서 보면 유대교의 전통에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졌죠. 하나님을 만날 수도, 그 앞에 나설 수도 없는 분이었죠. 그들은 온갖 율법들을 동원하여,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나열하죠.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그분의 뜻을 거스르지 않은 것이 그들의 신앙이었죠. 그들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쁨이 아니라 무거운 짐과 같은 사역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행을 해야 얻을 수 있다고 여겼고,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조차 애쓰고, 수고하고, 헌신하는 제사였죠. 기쁨이 아니었어요. 의무 방어와 같은 형식이었어요. 왜냐하면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노하실까 봐, 예배하지 않으면 나에게 해가 미칠까 봐 두려움에 드렸던 제단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비슷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두려움이 그 밑바탕에 깔린 마음이 있어요. 신기하게도 사랑의 하나님을 외치면서도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어쩌나?' '하나님이 복을 안 주시면 어쩌나?' 심지어는 나쁜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내가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 된 이들이 있죠. 두려움에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셨습니다. 너희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시죠. 그러니 기뻐하고 감사하라고요. 너희는 사랑받는 존재이며, 지금도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키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안심하라고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가난해도 즐거워하라고 말이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노니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에요. 우리가 기뻐할 때 사랑이 꽃 핀다고 말씀드렸죠? 그리고 우리가 기뻐할 때 하나님의 뜻도 완성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기쁘게 자신의 고난을 감당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조차 아름답게 사용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한 거죠.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신 방법입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도 심판이 있죠. 지옥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도 십자가가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바라보신 것은, 그분이 초점을 맞춘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활이었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다시 사는 삶이었고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고 꿈을 꾸는 것은 어려움 너머의 환희고, 고난 뒤에 따라올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우신가요? 심판이 있다는 것은 상급도 있다는 뜻이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심판의 저주가 아니라 상급이어야 하죠. 하나님의 심판 목적이 바로 그 상급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기쁜 거예요. 

 

기뻐하라는 말씀은 시도 때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추운 겨울 뒤에 따스한 봄이 있고, 깊은 골짜기 너머 높은 산이 있으며, 메마른 사막길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오아시스가 있음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기쁨은 확률이 아닙니다. 기뻐할 일이 많아서 우리가 기뻐하는 게 아니에요. 열 가지 일 가운데 단 하나 기뻐할 일이 있다면 그 하나에 집중하는 삶이 기뻐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에 집중하면 내 삶에는 기쁨이 100%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를 선택하는 나에게 점점 기뻐할 일들이 더 많이 보이는 겁니다.

 

나쁜 일을 묵상하지 마세요. 좋은 일들을 더 많이 묵상하세요. 죄를 묵상하지 마세요. 나의 의로운 일들에 더 집중하세요. 하나님의 심판보다 하나님의 구원을 더 묵상하세요. 나쁜 점보다 좋은 점에 더 주목하세요. 그때 나를 사랑하고 이웃까지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나쁜 일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훨씬 강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