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묵상일기 28 - 복음은 율법이 아닙니다.

2022. 9. 29. 06:57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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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12~15   우리는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얼굴의 광채가 사라져 가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그 얼굴에 너울을 썼지만, 그와 같은 일은 우리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은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책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너울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너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그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묵상을 시작하면서 좋은 아침이라는 인사를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들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 어떻게 인사를 하시나요? 혹시 일어나서 아무 말 안 하신 분 계신가요? 여러분의 기분이 아침에 어떤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힘들고 어렵게 일어날 수도 있고, 어제의 기분이 오늘도 나를 짓누를 수 있죠. 아니면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내가 만드는 하루가 아닐 거예요. 나에게 주신 하루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값지게 만들어야죠. 나의 하루가 주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복된 하루로 만들어야죠. 제에겐 그 첫 작업이 바로 아침 인사입니다. 하루의 첫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열리고 새로운 기분을 가질 수 있다면 해야 하지 않을까요? 새롭게 주신 오늘이 어떤 날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을 기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할 수 있죠. 그것은 하루를 기쁘고 웃으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첫 노력이 이 아침인사죠. 어떤 기분이든, 어떤 몸 상태든, 오늘 나의 첫 말은 기쁨과 기대를 담은 사랑이길 빕니다. 그 노력이 하루의 출발이 될 테니까요.

 

바울은 새 언약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지금 옛 언약, 그러니까 율법과 새 언약을 대비시키고 있죠. 여기에 율법을 제정할 당시 이를 받아들였던 모세가 소환되었죠. 바울은 모세가 돌판을 받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올 당시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장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요. 오늘 본문은 그중에서 모세가 그 광채를 가리기 위해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던 것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던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 광채 때문에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해서일까요? 아니면 이 광채로 인해서 자신이 신격화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일까요? 저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모세에게 임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죠. 이는 모세가 광채가 사라짐으로 사람들에게서 자신에 대한 권위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뭐든 그렇잖아요? 놀라운 능력이 있다가 사라지면 없었던 것보다 못한 일이 되기 십상이죠. 사람들이 마음이 그렇습니다. 주었다 빼앗으면 안 준만 못하고, 있다가 없으면 없느니만 못한 법이죠. 그럼에도 모세의 행동은 그런 류의 이유는 아닌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바울이 해석하는 핵심은 다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광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세는 이 율법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임을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채로 인해서 사람들이 영원한 것으로 알까 봐 수건으로 광채를 가렸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이 영원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만이 최대의 가치라고 여긴 것이죠. 마치 법치주의가 지상 최대의 정의인 것처럼 여기듯이 말이죠. 그러니 800원 때문에 유일한 직장에서 해고되고, 배고픔에 훔친 빵 한 조각이 징역 4년이 되는 겁니다. 800원이 아니라 800억을 횡령해도 해고되지 않는 이들이 있고, 살인을 해도 술을 먹어 기억이 나지 않으면 징역 4년은 고사하고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것이 법이죠. 사람을 잃은 법, 이해와 사랑을 잃은 법은 세상 어떤 칼보다 악랄한 망나니의 칼이 됩니다. 용서와 화해를 잃은 법은 휘두르는 자들만의 법이 되죠. 바울은 일부 유대인들이 율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죠.

 

때론 복음을 율법식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점령군의 의기양양처럼 누군가를 굴복시키려는 의지로 복음을 칼처럼 휘두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율법이 아닙니다. 복음은 살아 숨 쉬는 생명이죠. 사람을 위한, 사람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랑과 용서와 이해, 때론 기다림과 참음을 동반하죠.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해처럼 언제나 곁에서 거듭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돕고 함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이 아니어도, 비록 날카로운 반항을 하여도 그래도 사랑과 긍휼을 놓치지 않는 것이 복음이죠. 그래서 복음은 율법과 다릅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싸웁니다. 왜냐하면 정치가 이념화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사람들을 살리고 질서 있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있는 것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정치가 사상 투쟁의 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건 죽이건 상관하지 않죠. 그저 내가 믿는 이념만이 옳다고 말하죠. 여기에는 내 편만이 존재하죠. 다른 편은 죽여도 좋다는 전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죽자살자 싸우는 거죠.

 

복음은 이념도 정치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넓고 크신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러니 싸우지 마세요. 반대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사람들이죠. 하나님의 나라가 진리라면 말입니다. 어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다 이해합니까? 그렇다고 그 어린아이들의 인생이 끝장난 것은 아니잖아요? 분명히 어린이들도 클 것이고 언젠간 이해하고 지금의 어른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할 것을 믿으니 지금 버리지 않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런 이해와 사랑이 있어야 복음이죠. 물론 나도 아직 전부 다 아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죠. 나도 자라고 너도 자라고, 그렇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서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한 식구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세상과 척지지 마시고요. 비신자와 대립하지 마세요. 세상이 어딨고, 비신자가 어딨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그렇게 복음을 세워가는 우리들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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