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26. 07:10ㆍ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 3:7~9 돌판에다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비록 곧 사라질 것이었지만,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하물며 영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유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면, 의를 베푸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여러분의 아침이 환한 광채로 빛나길 기도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문자와 영으로 구분했던 바울은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제정되던 그때를 떠올립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켰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들고 내려왔죠. 그 장면을 출애굽기 34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출애굽기 34:29 모세가 두 증거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왔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으므로 얼굴에서 그렇게 빛이 났으나, 모세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하였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판에 새긴 언약으로도 빛난 광채가 함께 하는데 가슴에 새긴 언약은 어떻겠는가? 하고 묻고 있는 거죠. 이런 비교를 통해 새 언약의 중요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교법에 오해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치 율법은 중요하지 않고, 새 언약이 그 율법을 대체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으로 오해하죠. 바울은 율법에 대한 정의를 로마서에서도 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서 7장인데요. 그는 율법이 죄를 알게 한다고 했습니다. 죄를 알게 한다는 의미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인식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인식은 그 죄로부터 멀어지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그러나 우리는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죄로 인해 오용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그런데 고린도후서에서는 율법에 대한 그런 전이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율법이 본래 선한 것이었고, 우리를 살리는 기준이었다는 사실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이 전이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죠. 바울이 이미 여러 차례 이야기하고 나눴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율법의 불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닌, 율법과 새 언약의 조화를 위해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최근 동료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제게 생각거리 하나가 주어졌습니다.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교회에서 제일 힘든 분이 계신데 그분이 그러신다는 거예요. '삶이 기도인데 무슨 기도시간을 갖느냐'고요. 그래서 그분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네요. 모든 장소가 교회인데 꼭 주일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만이 예배냐면서 주일도 자주 빠지신데요. 아는 것도 많으시고, 신앙의 연조도 오래되셔서 권면이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어서 난감하다는 거예요. 사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삶이 기도고, 호흡이 기도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어느 곳이든 예배당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빠졌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정해진 규칙과 반복에 의해서 성장하고 깊어진다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통해 건강을 이루듯 규칙적인 생각과 마음, 교제나 나눔을 통해 우리의 영의 깊이가 더해지고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은 거죠.
습관은 가장 귀한 영적인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처럼 우리의 습관도 질서가 필요합니다. 불규칙한 식습관과 들쭉날쭉한 수면, 그리고 운동까지 질서가 없는 것에는 일관성 있고 깊이 있는 영성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질서 있는 습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를 제정하시고 규칙적이고 질서 있는 영적인 삶을 요구하시죠. 그 질서 위에 은혜와 사랑이 쌓이는 겁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지만 그래도 건강한 것만을 먹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그래도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하며 기준을 정하고 해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복된 자유죠. 모든 것을 할 수는 것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예요. 그것이 우리의 율법입니다. 건강을 위해 나를 구속하듯, 그리스도의 삶을 위해 영적 규범과 규칙의 습관을 갖는 자유가 우리가 추구할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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