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 06 -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2020. 10. 15. 07:11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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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0-11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였다.
한나는 서원하며 아뢰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 아침이 나를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귀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이런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과 뜻을 펼치시기 위해
오늘을 나에게 주셨다고요.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어요.
그분이 하실 일이 있으셔서,
꿈꾸는 일이 계셔서,
그래서 오늘 하루를 나에게 허락하시고,
나를 통해 이루시려고 주셨다고요.
그런 생각을 하니
오늘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네요.

오늘 본문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서원기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서원이란 한 마디로 맹세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원하는 것을 기원하며 어떤 맹세를 하는 것을 의미하죠.
한나는 아들을 얻기를 바라며,
아들을 주님의 종으로 살게 할 것을 맹세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2가지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는 '이 기도가 처음이었을까?' 하는 점이에요.
이것이 궁금한 이유는,
'기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같은 기도를 반복하게 되잖아요?
소위 끈질긴 기도를 요구하기도 하죠.
얼마나 기도해야 소원이 이루어질까도 궁금해합니다.
과연 한나는 얼마나 이런 기도를 이어왔을까요?

일단, 그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을 전제하고,
문맥상 추측을 해 보기로 하죠.
먼저 분명한 점은,
한나가 아들이 없어 괴로웠던 시간은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매년 주님의 성전에 올라왔을 때
더 극심한 괴로움은 반복되었죠.
그렇다면 그녀가 적어도 주님의 성전에 올라오는 날마다
기도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물론 자신의 집에서도 기도는 이어졌겠죠.
상식적으로, 
그녀의 괴로움은 늘 그녀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기도를 해 왔을까요?
그녀가 계속해온 기도는 
오늘 본문과 동일한 서원의 기도였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문맥상 그녀의 이전 기도와
오늘 본문의 기도는 달랐을 것으로 저는 추측이 되네요.
이유는 마치 오늘 기도가 그녀에게 전환점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점도 그렇고,
아직 묵상 이전이지만, 

18절에는 마치 한나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음식도 먹고, 슬퍼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오늘의 기도는 어쩌면 그녀에게 처음 있는 기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해답을 얻은 기도처럼 말이죠.

그렇다면 이전의 기도는 어땠을까요?
보통 우리는 서러움과 아쉬움, 안타까움과 괴로움에 휩싸일 때는
자기 이야기를 하기에 급급합니다.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자기변명이 동원되죠.
간혹 그 설움의 대상이 있다면 비난도 한몫합니다.
어쩌면 투정이라고 할 만큼
두서없고 거친 언어들이 복잡한 감정과 어울려 기도로 나오죠.
한나가 그런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설움에 복받쳐 기도해 본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런 기도로 한탄을 하며 시간을 보낸 세월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제게 다가왔어요.
그것은 한나의 기도에 대한 직접적인 궁금증입니다.
좀 유아적인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집고 넘어가야 할 의문이기도 하죠.
한나의 바람은 아들입니다.
왜 그렇게 아들을 바랐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아들이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는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아들을
왜 다시 하나님께 드리려 할까요?
하나님께 아들을 달라고 해놓고는 
다시 하나님께 아들을 받치겠다고 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나요?
도로 드릴 거면 왜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 아침에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있어요.
기도는 내 유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요.
한나는 아마도 이전에 자신을 위해 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을 테죠.
자신의 유익, 자신의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녀가 오랜 기도를 해 오면서,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것은 기도가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그녀는 기도를 바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게 아들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긴 거죠.

가끔 몸이 아픈 이들이 이런 기도를 해요.
건강 주시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면 건강이 왜 필요해요?
그래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는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과 계획, 그 나라와 의를 위한 것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번 기도를 바꾸어 볼까요?
오래된 기도, 여전히 슬픔에 젖은 기도가 있다면,
한번 돌이켜 보죠.
혹시 나의 유익을 위한 기도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는지를.
그리고 이제,
그분의 섭리와 계획 안에 그 기도를 드리면 어떨까요?
비록 내 자식, 내 삶, 내 문제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으로 승화시켜
그분이 일하시고 꿈꾸게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나의 기도가 바뀌면,
주님의 응답도 바뀔지 모릅니다.
기도는 내가 아니라 그분을 위한 도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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