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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 01 - 불평등과 불공정에서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삼상 1:1~2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숩의 자손 엘가나라는 사람이, 에브라임의 산간지방에 있는 라마다임에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로함이고, 할아버지는 엘리후이고, 그 윗대는 도후이고, 그 윗대는 숩이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설교를 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5:45,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이
왠지 모르게 너무 제 가슴에 울립니다.
나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동일하게 역사하시고,
언제나 어느 때나 일정하게 대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가슴 벅찬지
모르겠어요.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아마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며
제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비릿한 냄새의 불편한 기운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사무엘서를 묵상하는데요.
첫 메시지가 제 비위를 상하게 하네요.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어디 출신인지,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제게 그리 관심거리는 아닙니다.
그에게 아내가 둘이었다는 사실도
별반 큰 거부감은 없습니다.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게다가 지금과도 다르고,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인정한다면
이해해 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그다음 문장입니다.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문제입니다.
불평등의 문제이고,
불합리의 문제입니다.
왜 착한 사람은 고통이 더 많을까요?
왜 가진 사람은 유세를 떨까요?
왜 우리 인생은 평등하지 않을까요?
왜 차별이 있을까요?

이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넘어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신이 불평등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죠.
또한 이 민감한 문제는
질투나 미움, 시기와 다툼의 싹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불평등합니다.
우리의 삶은 불공정하죠.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못 생겼어요.
누구는 잘났고, 누구는 못났으며,
누구는 가졌고, 누구는 못 가졌습니다.
삶의 출발점은 엄연히 차이가 있고,
양극의 카르텔은 운명을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분노와 한숨 섞인 투정으로 하늘을 향할 즈음,
언뜻 떠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래서 이 책이 쓰여진 것이구나" 하는 거예요.
그 불평등에서 사무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요.
불공정한 게임에서,
차별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한나의 눈물에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 벅찹니다.

늘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아픈 데서 출발했고요.
하나님의 기적은 그렇게 모난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이르는,
불평등이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불공정한 나의 처지가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그분의 일하심이 시작될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합니다.
그래서 가슴 아프고, 분노가 일죠.
여기가 끝인 것 같아서,
이것이 영원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안 계실 때의 이야기예요.
그분의 스토리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서,
고통의 이집트에서,
죽음의 십자가에서 그분의 기적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그래서 나의 불평등은 나의 간증이 될 수 있어요.
나의 불공정은 내 안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증명할 기회가 될 수도 있죠.

이렇게 불편한 내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인생을 탓하지 않기로 했어요.
내가 바라는 것은,
내 인생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섭리니까요.
오히려 내게 이른 불평등이
그분의 마음을 더 간절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
감사하기까지 합니다.
이 마음이,
이 묵상이,
오늘 내게 임한 첫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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