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 07 - 편견을 깨면 더 넓은 세상이 보입니다.

2020. 10. 16. 07:26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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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2-16   
한나가 주님 앞에서 계속 기도를 드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는 한나의 입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나가 마음속으로만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므로, 입술만 움직이고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생각하고, 그를 꾸짖었다.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것이오? 포도주를 끊으시오."
한나가 대답하였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맑고 밝게 시작하는 하루,

어제의 걱정과 시름을 뒤로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다시 가슴 뛰는 하루를 여는
여러분들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한나의 절절했던 기도가 끝났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처절할 정도로 간절했던 것 같아요.
그의 입에서 소리가 터져 나오지도 못할 만큼
응어리지고 마음속 깊은 신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복받친 감정과 깊은 한숨에는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꽉 막힘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한나는 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을 제사장 엘리가 보았던 모양입니다.
엘리에 대한 묵상이 몇 번 더 있을 것이라고 했죠?
오늘 다시 한번 엘리를 통해 
반면교사 삼을 일이 있습니다.
그는 멀리서 한나의 기도를 지켜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도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한나가 술에 취한 줄 생각했데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판단이죠?
조용히 기도할 수도 있잖아요?
소리 내지 않는 기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가 그런 판단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혹시 기도는 소리 내며 해야 한다고 믿었을까요?
큰 소리를 내고, 울부짖어야 간절한 기도라고 여겼을까요?
보통 중심을 잃은 예배일수록 형식에 치우치고,
본질을 잃을수록 외형에 힘을 쏟게 되죠.
사사시대의 마지막이 그랬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이웃 나라와 같은 왕의 통치를 바라고,
종교적 국가가 아닌,
정치적 국가를 꿈꾸는 시기였으니까요.
소나무 하나쯤 뽑아야 기도 좀 했구나 싶고,
목소리가 쉴 만큼 소리 질러야 은혜 좀 받았구나 싶었을지도 모르죠.

9절에 보면,
엘가나 일행이 주님의 집에서 음식을 먹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죠.
당시 성전에서는,
정확히는 성전이 아닌 성막 정도였습니다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음식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해요.
그냥 즐겨 마신 정도가 아니라
음주가 다양한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며 기도하는 이들이
이전에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엘리 또한 그런 장면을 많이 보았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한나를 보고도 그리 쉽게 판단했을까요?

아무튼 엘리는 잘못된 판단으로 한나를 질책합니다.
섣부른 판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도 너무 용감하게 합니다.
다짜고짜 술을 끊으라고 했으니까요.
듣는 한나는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부끄러움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의 몫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잘못된 판단과 오판을 지켜보며
웃어 넘기기엔 제 마음 한 켠이 싸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그동안 목회자로, 얼마나 많은 섣부른 판단을 했을까?”
"사람들의 마음을, 그들의 말을,
너무도 쉽게 규정짓고, 판단하며,
결론을 내리고는 얼마나 쉽게
조언이랍시고 이래라저래라 했을까?" 하는 마음이
오늘 이 아침 제 가슴을 짓누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을 이해하며 살까요?
얼마나 그들의 말을 들어주며 살까요?
얼마나 그들의 행동을 잘 이해할까요?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고,
무엇을 경험하며 학습이 되었든,
단정적인 판단과 섣부른 정죄는
누군가의 삶을 꺾어 버리는 무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나로 그칠 수 있는,
나에게서 도움을 받고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들어 버릴 수는 있죠.
마치 마지막 전화를 받은 사람처럼…

그렇다면 엘리의 이런 판단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왜 섣부른 판단을 하게 될까요?
왜 사람을 내 시선으로 규정지을까요?
왜 ‘저 사람은 이래!’라고 단정을 하는 걸까요?

그 뒤에 숨어 있는 우리의 죄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편견’이에요.
편견은 우리가 사고하고 인지하며 결정하기 전에
이미 우리 머리에 들어와 있는 인식을 말하죠.
우리는 많은 편견을 가지며 삽니다.
편견이 어떤 것인가를 논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다만 편견이 평가를 부르고,
편견이 섣부른 판단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편견으로 인해 갖는 관심 또한 편견이라고요.
가령, 장애인에 대한 관심,
혹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혹시 편견에서 출발했다면,
그들을 위한 나눔과 도움 또한 편견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편견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감정이나 인격을 가리지 않습니다.
좋은 일, 혹은 나쁜 일에도 편견은 존재하죠.

어쩌면 사랑은 어떤 행동이 아니라
편견을 버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편견을 깨면 더 넓은 세상이 보입니다.
여자나 남자가 아닌 그저 사람으로,
술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가 아닌 그저 기도자로,
얼굴이 불든, 눈물을 흘리든,
아픔이 있든, 소리를 지르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내가 필요해서 온 영혼으로,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
그때 우리의 판단이 맑아지고,
그때 우리는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도 하루라는 시간에 갇혀 살겠죠?
그 물리적인 시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편견에 갇혀 살지는 마세요.
내가 지나온 시간이 준 편견이 
또 다른 시간이 되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오늘은 오늘의 나로 존재하고,
오늘은 오늘의 이웃으로 인정해주며,
오늘은 오늘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이길 빌어요.

똑같은 시간 속에 더 많은 것이 보이는 하루이길 빕니다.
똑같은 나에게서 더 많은 기도들을 품고,
똑같은 이웃에게서 더 많은 이해를 발견하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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