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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느헤미야서묵상

느헤미야서묵상 64 - 회개는 리모델링이 아니라 신축입니다.(느13:4~9)



새번역성경
4   이 일이 있기 전이다. 우리 하나님 성전의 방들을 맡고 있는 엘리아십 제사장은 도비야와 가까이 지내는 사이이다.
5   그런데 그가 도비야에게 큰 방 하나를 내주었다. 그 방은 처음부터 곡식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과 성전 문지기들에게 주려고 십일조로 거두어들인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제사장들의 몫으로 바친 제물을 두는 곳이다.
6   이 모든 일은, 내가 예루살렘을 비웠을 때에 일어났다. 나는 바빌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왕을 뵈러 갔다가, 얼마가 지나서 왕에게 말미를 얻어,
7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서야, 엘리아십이 하나님의 성전 뜰 안에 도비야가 살 방을 차려 준 이 악한 일을 알게 되었다.
8   나는 몹시 화가 나서, 도비야가 쓰는 방의 세간을 다 바깥으로 내던지고,
9   말하였다. "그 방을 깨끗하게 치운 다음에, 하나님의 성전 그릇들과 곡식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다 놓아라."


좋은 아침입니다.
감사로 하루의 문을 여시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제가 어릴 적에 동양방송(TBC)이라는 방송국이 있었어요.
KBS, MBC와 함께 3대 방송사로 알려져 있었는데요.
1980년 군부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통폐합이 되어서
강제로 문을 닫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TV 방송사였죠.
이 방송사가 문을 닫고 대신 KBS 2 TV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간 방송사가 정부의 손에 의해 통폐합이 되던 엄혹한 시절이 있었어요.
이 방송사가 삼성그룹 계열이어서,
현재 JTBC의 전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네요.

아무튼 이 방송사에서 방영되었던 만화영화를 기억합니다.
1970년대 후반이었나요?
제가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아요.
[이상한 나라의 삐삐]라는 만화였어요.
꿈의 세계에 들어가 여러 마을을 괴롭히는 악당 대마왕과 맞서
마을을 구해내는 그런 스토리로 구성된 만화였죠.
그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어요.
아마도 큰 통찰력을 얻은 것처럼 매우 인상이 깊었던 것 같아요.

주인공 폴과 일행이 철(鐵)의 마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김없이 대마왕은 그들을 공격하기 위해 모략을 세우죠.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위해 녹가루를 준비합니다.
아무리 강한 철이라도 녹슬면 아무 쓸모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대마왕 끄나풀인 버섯돌이가 녹가루를 마을에 뿌립니다.
이런 작전을 눈치챈 주인공 폴은 대비를 하는데요.
그 대비책은 마을에 있는 모든 철에 기름을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름칠을 한 철에는 녹이 스는 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폴과 일행은 바삐 온 마을에 기름칠을 시작합니다.
버섯돌이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 대부분의 기름칠을 마쳤는데요.
아뿔싸!
한 뺨 정도의 공간을 남기고는 기름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전체로 보면 불과 0.1, 아니 0.01%도 되지 않는 작은 부분이지만
결국 그들은 완전히 기름칠을 하지는 못했어요.
설마 이 작은 부분으로 문제가 생길까 싶었죠.

다행스럽게도 버섯돌이의 녹가루 공격은 기름칠에 막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녹가루를 뿌려도 기름칠 된 철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죠.
그렇게 목적을 이루지 못한 버섯돌이는 실망하며 공격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은 녹가루를 던지고 떠나죠.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마지막 녹가루가 날아 날아 불과 0.01%도 되지 않는 기름칠이 안 된 부분에 떨어졌습니다. 
그 철의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네, 전부 검붉게 녹이 슬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작은 틈새 때문에 기름칠한 부분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죠.

아침 묵상이 마치 만화영화 리뷰처럼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그 내용에 어린 저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영적 통찰력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평가일까요?
아무튼 설마? 하는 작은 일이 모든 수고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제 안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오늘 본문에도 등장하네요.
느헤미야가 겪었던 내용이죠.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를 마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페르시아 왕이 돌아오는 것을 조건으로 귀환을 허락했던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2장의 내용이죠?
어느덧 자리를 잡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에게 자신의 그간 일들을 보고한 다음,
다시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 같아요.
그 기간이 얼마나 걸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무리 빨리 돌아왔다고 해도 족히 1년 남짓은 걸렸을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요.
돌아와 보니 그 기간 동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비야라는 사람이 성전의 곳간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도비야가 누굽니까?
느헤미야서를 묵상한 분이라면 이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 작업을 극심하게 반대하고 방해를 일삼았던 인물이죠.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와 살아요.
그것도 성전 안에서,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열매와 십일조를 보관하는 창고를 차지하고 말이죠.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혹시 도비야가 회개를 했던 것일까요?
혹시 그의 회개를 이스라엘이 사랑으로 받아 준 것일까요?

그러나 정황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단지 제사장 엘리아십의 개인적인 친소관계에 따라 이루어진 일인 듯 보여요.
엘리아십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승자의 여유였을까요?
아니면 너그러운 용서였을까요?

사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를 우리가 모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또한 이런 일들이 수시로 벌어지니까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적당히”입니다.
우리는 적당히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고비를 넘기면, 위험을 지나면,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이제 적당히’라는 속삭임이 몰려오죠.
어쩌면 그렇게 그때는 긍휼함이 넘치는지,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들죠.
그런데 그 용납과 용서가 옳은 것이라면 너무 좋겠는데요.
이때 벌어지는 용납과 용서는 그리 좋은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주로 게으름, 대충대충, 나태함, 이런 것들에 대한 용서가 차고 넘치죠.
모두 다 ‘적당히’라는 합리화에서 나오는 생각들입니다.

회개는 리모델링이 아니라 신축입니다.
적당히 벽지나 새로 하고, 장식품들을 바꾸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지금은 처음부터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하는 것이죠.
나는 사랑을 할 수도 없어요.
나의 사랑은 편협하고, 나의 사랑은 모순덩어리입니다.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의 사랑도 번 어게인 해야 합니다.
나는 사랑할 수 없으나 그분의 사랑에 힘입어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나를 완전하게 버리고 새로 지어져야 사랑도 비로소 시작됩니다.

적당히 남겨둔 나의 옛사람이 언젠가는 나를 녹슬게 할지도 몰라요.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나의 옛 것을 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새롭기 위해서는 철저히 나를 버려야 해요.
적당히 고치는 것이 아니라 허물고 새로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이고, 그것이 신앙의 출발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아침입니다.
새로운 아침을 주신 이유는, 어제의 것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뜻일지도 몰라요.
오늘은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어제의 감정으로, 어제의 걱정으로 오늘을 살지 마세요.
감사와 찬양으로 새로이 짓는, 여러분의 오늘 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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