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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느헤미야서묵상

느헤미야서묵상 69 - 좋은 루트를 잡으세요.(느13:28~29)


새번역성경
28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인 요야다의 아들 가운데 하나가 호론 사람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기에, 나는 그자를, 내 앞에서 얼씬도 못하도록 쫓아냈다.
29   "나의 하나님, 그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은 제사장 직을 더럽히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언약을 저버린 자들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좋은 아침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이 아침처럼 하얀 도화지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도화지에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거죠.
우리가 그리는 그림에 따라 그 도화지는
예쁠 수도, 삭막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때론 수억의 가치가 되기도,
때론 쓰레기통으로 떨어지기도 하겠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상관없이 펼쳐지는 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은혜를 만들어 가시죠.
우리를 통해 은혜를 빛나게 하십니다.

혹시 ‘그게 무슨 은혜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형이라고 느끼시기 때문일 거예요.
선물처럼 말이죠.
그런데 선물이라는 것이 그래요.
선물이 그 자체로 있지 않죠.
상대가 있고,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선물조차 일방적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인데요.
매일 아침 주어지는 하얀 도화지가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오늘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인지 말이죠.
오늘을 새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를요.

그런 도화지 위에 오늘,
여러분이 그린 그림대로 값어치를 하게 될 것이라면,
어떤 그림을 그리실까요?
저는 일단, 좋은 마음으로 그림을 시작하겠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말이죠.

이렇게 좋은 아침에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갑갑함과 한숨을 부릅니다.
알려줘도 모르고,
가르쳐줘도 잊어버리는 
건망증 만렙의 인간들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답답해지죠.

어제와 오늘의 본문을 통해
느헤미야는 세 번째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에게는 
예배와 말씀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에 이은
세 번째 영적 개혁의 메시지인 셈이죠.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 가정에 나쁜 영향들이 미치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부분을 몇 차례에 걸쳐
새로이 해석하였습니다.
이를 남 탓으로 돌리면
종교적 배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이나 상대일지라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자로 성장해야 함을
기록한 본문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온실에서 자란 화초가 
예쁠 수는 있어도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많은 외부의 비바람에도
견뎌내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내 스스로 골방에 갇히고,
세상과 담을 쌓으며 지키는 신앙이
그리스도의 정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매우 적극적입니다.
나쁜 영향을 차단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좋은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것이 
그 정신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이 있죠.
어디서나 거룩한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니까요.

그렇게 이방 여인이든, 삼방 여인(?)이든,
그 누구든, 가족이 되었으면,
내 가진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합니다.
자녀가 잘못했을 때 대부분은 부모들이 이렇게 말하죠.
내가 잘못 가르친 탓이라고요.
물론 그것이 옳은 생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사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 것은 분명하죠.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총체적 난국을 한마디로 표현해 줍니다.
다시 엘리아십이 등장하죠. 
대제사장이며, 
도비야에게 성전의 곳간 하나를 내어주었던 인물입니다.
그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고 하네요.
이제야 비로소 엘리아십이 어떤 인물인지 드러납니다.
느헤미야의 입장에서는
적과 내통한 인물쯤으로 해석이 될만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말하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고위 인사가 일본과 내통을 하는 것쯤 될까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들의 책임을 묻는 기도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영적 개혁 메시지는 뭘까요?
책임 있는 자리의 사람들은 각성하라? 정도 될까요?
아니면 종교 지도자들은 똑바로 하라?일까요?

저는 이 엘리아십의 모습이 
어제의 본문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정한 이들의 문제로 치부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누구를 사귀고, 누구와 함께하며,
누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아십이 산발랏과 도비야를 두둔했던 이유는,
무슨 거대한 꿈이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들과 친하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정보를 얻는 곳,
자신이 생각을 공유하는 곳이 그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일반 백성들의 생각과는 다른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 잘 모르죠.
마치 오늘날 정치인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들 내에서만 영향을 주고받죠.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말이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들과 친하게 지내시나요?
어떤 곳에서 정보를 얻고, 
어떤 곳에서 영향을 받나요?
우리 교회가 이끄는 비영리 교육단체 다림교육의 학부모들이 곧잘 이런 말을 해요.
강남 엄마들 속에 있다가 보면 자신들이 자녀교육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데요.
학원을 보내야 할 것 같고, 과외를 해야 할 것 같고,
자녀들을 닦달해야 할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다림교육에 와서 교육철학을 나누면,
자녀들에게는 사랑과 인정이 가장 큰
학습능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좋은 루트를 잡으세요.
좋은 정보를 받으세요.
책을 무작정 읽지 마세요.
좋은 책을 골라 읽으세요.
유튜브도 막 보지 마세요.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받아들이지 마세요.
분별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딱 한 가지의 기준이 있으니까요.
내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내 속에 미움과 다툼을 만들게 하는 정보는 멈추세요.
내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편을 가르게 하는 영향으로부터도 벗어나세요.

아무리 많은 정보여도 끼리끼리의 정보는 편협합니다.
내 마음을 넓히고, 더 많은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
긍휼과 용서와 하나 됨을 꿈꾸는 자리,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영향력을 붙드세요.
어쩜 이 세 번째 개혁 운동이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싸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또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놓이겠죠?
그 속에서도 이웃을 사랑하고,
낮은 자리를 돌아볼 수 있으며,
함께 나누고 협력하는 마음을 품고 오늘을 사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늘도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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