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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느헤미야서묵상

느헤미야서묵상 70 - 여러분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느13:30~31)


새번역성경
30   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묻은 이방 사람의 부정을 모두 씻게 한 뒤에, 임무를 맡겨 저마다 맡은 일을 하게 하였다.
31   또 사람들에게 때를 정하여 주어서, 제단에서 쓸 장작과 처음 거둔 소산을 바치게 하였다."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이 아침에 주님의 평강이
요동치는 우리의 마음에 
잔잔한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은혜 있기를 빕니다.

어느덧 느헤미야서 묵상이 일흔 번째가 되었네요.
3개월 남짓 동안,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저에게는 위로와 회복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느헤미야의 귀환 결정과 함께
저도 새로운 장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었고,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는 기간 동안,
저 또한 교회를 세우는 공사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마치 그 느헤미야와 함께 하는 듯한 착각에 빠져
지친 어깨를 함께 걸고,
무거운 책임감 속에 함께 눈물지으며
느헤미야를 묵상했습니다.

그 속에서
매번 낙망하고 낙심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였고,
그런 못난 자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 삶이 고달플수록 그분의 손길이 더 강해지고,
내 마음이 연약할수록 그분의 말씀은 더 또렷해짐을 느꼈습니다.
내가 아플수록 그분의 눈물은 더 뜨거웠고,
내가 쓰러지면 어쩔 줄 모르시고 바삐 움직이시는 그분의 간절함에서
큰 위로를 받곤 했습니다.
냉정한 제삼자가 아닌,
자신의 피붙이처럼 나를 여기시며 안절부절못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오히려 너무도 큰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어쩔 줄 모르신다거나, 
안절부절못하신다는 표현은 
그분의 전능하심을 부인하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도 인간적이시고, 
너무도 가까이 계시는 그분을 느끼는
제 개인적인 표현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어떤 말씀을 제 마음에 부어주실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아침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를 접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이 구절을 읽자마자 
저도 똑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 공동체 가족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복을 내려 주십시오."

우리 아름다운주님의 공동체 가족들 위에 주님의 복이 임하시길 빕니다.
이 아침,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함께 묵상하는 모든 이들 위에 주님의 복이 임하시길 빕니다.
주님의 나라를 꿈꾸며 자신을 드려 낮은 곳에 임하는
모든 분들께도 주님의 복이 임하시길 빕니다.

오늘 묵상을 이렇게 끝내기에는 조금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가 묵상해야 할 네 번째 영적 개혁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죠.
13장에 들어서 우리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기준으로 우리의 영성을 개혁할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예배와 말씀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것과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좋은 영적 영향력을 주고받으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개혁 메시지였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메시지인데요.
저는 그 메시지를 30절에서 찾았습니다.

느 13:30   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묻은 이방 사람의 부정을 모두 씻게 한 뒤에, 임무를 맡겨 저마다 맡은 일을 하게 하였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사역은,
저마다에게 임무를 주고, 
그 임무의 맡은 일을 하게 한 것이었어요. 

매우 평범한 이 말이 오늘 아침 
저에게는 너무도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당신이 누구신지를 처음으로 밝히는 장면이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와의 대화에서죠.

출 3:14, 나는 곧 나다.(I Am Who I Am)

여러분들도 다 들어 보셨죠?
그런데 저 말을 이해하시나요?
나는 나라고요?
개역성경에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냥 존재한다는 뜻이죠.
마치 어떤 사물이 그냥 존재하듯, 그저 존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술어가 없으면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술어) 나여야 하는 것이죠.
어여쁜 나라든지, 멋진 나, 혹은 키가 큰 나, 이렇게 말해야 익숙하죠.
그냥 존재로서 나를 이해하지 못해요.
나는 그냥 나라고!
이 말을 하면 건방지다거나 무슨 헛소리냐고 하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뒤에 자꾸 술어를 붙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혹은 '복 주시는' 등의 말로 말이죠.
우리가 술어를 붙이면 그 존재는 술어에 한정됩니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요 8:28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의 존재에 술어를 붙였기 때문이죠.
나라를 독립시켜 주실 예수님?
나를 잘되게 하실 예수님?
이런 술어로 예수님을 귀속시키며 자신들이 핸들링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분의 창조물인 '나 또한 곧 나'입니다.
'무엇을 이루는' 나도, '어떤 재능의' 나도 아닌,
존재로서의 나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삶이든,
어떤 조건이 붙고, 어떤 상황에 놓이든,
나는 그저 나죠.
가난하든, 부유하든, 건강하든, 연약하든, 많든 적든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어떤 술어로 나의 존재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분이 지으신 아름다운 존재일 뿐이죠.

그런데 우리는 수없이 술어를 붙여요.
이래야 복을 받은 것 같고,
저래야 은혜받은 것 같은 나를 만듭니다.
그래서 주어로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술어로 값어치를 매기려 하죠.
창조물인 나로 가치 있는 존재인데도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나는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어떤 시대, 어떤 성취, 어떤 환경으로도 평가되지 않는,
오직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인 존재로 평가되는 나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단지 맡은 바 자리를 잘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삶을 사는 존재라고요.
 
진짜 영적 개혁은,
술어로 나의 존재 가치를 따지려는 사탄의 음모를 깨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속삭임은 이런 것이었어요.
'죽지 않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되는' 나 였습니다..
'어떤' 나를 말하는, 모두 다 술어였습니다.
그 술어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것이 죄의 근본이죠.

잘못해도 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문제 많아도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가난해도, 부족해도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분이 만드신, 그분의 존재입니다.
다른 것으로 나를 평가하지 마세요.
나는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주님의 창조물이신 여러분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자녀이신 여러분은 그 자체로 존귀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기신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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