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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느헤미야서묵상

느헤미야서묵상 68 -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느13:23~27)



새번역성경
23   그 때에 내가 또 보니, 유다 남자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의 여자들을 데려와서 아내로 삼았는데,
24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이 아스돗 말이나 다른 나라 말은 하면서도, 유다 말은 못하였다.
25   나는 그 아버지들을 나무라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고, 그들 가운데 몇몇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였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두고서 맹세하게 하였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딸들을 이방 사람의 아들에게 주지 마시오.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들도 이방 사람의 딸을 아내로 데려와서는 안 되오.
26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죄를 지은 것도, 바로 이방 여자와 결혼한 일이 아니오? 어느 민족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하나님은 그를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소. 그러나 그마저 죄를 짓게 된 것은 이방 아내들 때문이오.
27   이제 당신들이 이방 여자들을 아내로 데려와서, 이렇게 큰 잘못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소?"


좋은 아침입니다.
특별히 오늘 아침이 저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젯밤이 매우 피곤한 밤이었거든요.
어제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저는 오늘 아침을 상상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며 피곤한 상태였기에
저는 오늘 아침, 일어나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묵상은 어떻게 하나?
일어날 수는 있을까?
그런 고민에 빠지다 결론을 내었습니다.
"나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피곤하니까!"
"아침 묵상도 못 하겠지? 왜냐하면 못 일어날 테니까!"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떴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상쾌하게 일어났습니다.
괜한 고민을 하며 잠든 저녁을 보았어요.

대부분 우리의 상상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우리의 평가는 부정적일 때가 많죠.
그리고 함부로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수록, 우리가 어려울수록, 피곤할수록,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 또한 강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가 연약해질 때에
주님의 강한 임재를 느끼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이 감사하고 소중합니다.

제가 주님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부족해도, 능력이 없어도, 모자라도,
꾸준히 주님과 함께하는 아침의 시간을 갖기로 말이죠.
그리고 꾸준히 묵상하기로 말입니다.
때론, 내놓기조차 부끄러운 글들이 수두룩하지만
그조차 나임을 인지하며 멈추지 않겠다고 주님 앞에 다짐했습니다.
그것이 저의 아침의 시작이죠.
그리고 아침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 아침은 특별히 소중하네요.
어젯밤의 부끄러움과 함께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묵상이지만 제겐 매일 나를 깨우는 막대기이고,
흔한 묵상이지만 제겐 언제나 새로이 정체성을 세우는 지팡이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귀한 시간입니다.
그런 감사로 시작하는 오늘이어서 좋습니다.

이런 마음과 함께 오늘 본문은
어젯밤의 연약한 나의 모습과 같은 이스라엘을 봅니다.
자신들의 맹세를 현실과 쉽게 엿 바꿔먹는 것 같은 모습이에요.
이방 여인들과의 혼인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사인한 잉크 자국이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암몬과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왜 그 여인들을 아내로 쉽게 맞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더 이뻐서 그랬는지, 아니면 아내 얻기가 힘들었는지
사실을 알 수는 없어요.
다만 맹세를 손바닥 뒤집듯 할 만큼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부러는 아닐 것이라는 것이죠.

이미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 문제가 어떤 의미인지는 묵상으로 나눴기 때문에 차치하고,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중요한 대목을 되짚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책임 소재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고,
이로 인해 그들의 자녀들은 유다 민족의 말을 잃었다는 것이죠.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실해 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혼합되어 갔다는 거죠.
이것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어렵잖게 알 수 있습니다.
정체성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 핵심의 이야기를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잘 안 되어서 문제이지 모르지 않아요.
그래서 ‘정체성을 잃지 말라!’ ‘근본을 잃지 말라’ 같은 말은 오늘 접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정체성을 잃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 싶어요.
누구의 잘못일까요?
왜 그들의 자녀들은 언어를 잃었을까요?
왜 정체성을 잃어야만 했을까요?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잘못일까요?
분명히 그렇지만 이는 너무 1차원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근본주의적인 접근은 배타성만 키울 뿐이죠.
그렇다면 자녀의 교육을 도맡은 이방 여인들의 잘못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남 탓을 하기 좋아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가 손 놓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반복이 많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어제 맹세했는데 오늘 어깁니다.
그래서 또 잘못을 꾸짖고 다시 새로이 세우죠.
이런 반복이 계속되는 것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지속적이고 꾸준한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느헤미야의 주기라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반복적인 일정한 자극이 있어야 하죠.
매일 길을 묻고, 자신을 돌아보며 살펴야 길을 온전히 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이방인과 결혼했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나와 다른 이들과 의기투합했다고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손잡았다고 끝이 아니에요.
결혼을 했다면 이제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마음,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소망을 품기 위해서는
우리는 꾸준히 내 안에 있는 나의 정체성을 나눠야 하죠.
마치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말이죠.
얼마나 자녀들과 말하지 않았으면 아버지의 언어를 잃어버렸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사람들에게 자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요.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내가 어떤 소망을 품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말하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세상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어디서든지 자신의 이야기, 내 안에 중심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라는 말씀일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사세요.
무슨 푸념이나 자랑을 하라는 말씀은 아니에요.
내 안에 진짜 살아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내가 꿈꾸고자 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떤 세상을 꿈꾸는지,
말하며 사세요.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빠의 꿈은 무엇인지,
내 안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말하며 사는 것이 증인 되는 삶입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정체성이 공유되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말하며 사세요.
어떤 꿈이 있는지 말하며 사세요.
어떤 소망, 어떤 비전이 있는지 말하며 사세요.
내 안에서 말씀하시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가족에게 말해 보세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우리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런 고백 속에서 결정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그 고백에서 나와요.

오늘 이런 시간 한 번 가져보면 어떨까요?
누구라도 좋습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꿈을 한번 말씀해 보시죠.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지 말이죠.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면,  
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혹시 내 이야기가 없어서 말 못 한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실 뭔가가 있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야기하니까 그런 삶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나누는 대로 우리의 삶이 하나씩 만들어지니까요.

오늘도 웃음 짓는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내가 소망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하루 되시길 빌어요.
맑고 밝은 하루를 소망하며 기대하는 여러분에게 복 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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