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서묵상03 - 내가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곧 무력(無力)할 때 믿음이 자랍니다. (느헤미야서 1:3~4)

2020. 5. 4. 06:25묵상하는말씀/느헤미야서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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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는 형제 하나니로부터 조국의 형편을 듣고 슬퍼합니다. 아마도 조국에 대한 막연한 생각으로 지금껏 지내지 않았나 싶어요. 타인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면 갖게 되는 태도가 있어요. 그것은 ‘타인이 다 나 같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내가 사는 만큼 살겠지, 내가 먹는 만큼 먹겠지, 그런 생각을 하죠. 누군가 큰 고통을 당하고 아픔에 잠길 때, 누군가 상심하여 슬픔에 빠질 때, 우리는 곧잘 대수롭잖게 여길 때가 있죠. 그런 반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생각, 나의 처지를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타자의 입장과 생각에서 나를 비춰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전에는 느헤미야에게 그런 태도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울었던 것은, 조국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을테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에 대한 회개도 있었을 거예요.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무심했구나, 나만 생각했구나’하는 회개 말이죠.  

그런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습니다. 조국을 도울 만큼 큰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자신 하나 가서 도울 수 있는 힘도 없을뿐더러 당장 마음먹는다고 어디를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닌 그저 묶여있는 노예에 불과하죠. 아무리 마음이 들썩거려도, 돕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처럼 난감한 경우는 없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이럴 때 생기는 것이 무력감(powerlessness)입니다. 무기력해지고, 허망해집니다. 사람에게 가장 극심한 공포가 몰려오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내가 뭘 할 수 없는 이때,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이때, 공포와 불안은 극대화되고, 자포자기에 이르죠.

바로 그때, 세상에 뿌리를 둔 사람과 그리스도에 소망을 둔 사람의 차이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그 무력함에서 믿음이 자라니까요. 세상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그 무력함에 빠질 때 자신을 버립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죠. 반면 그리스도에 소망을 둔 사람은 그때 기도합니다. 내가 할 수 없으니 주님이 하셔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기도는 무력함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할 수 있고,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듯이 말이죠. 그런 의미로 보면 가장 슬프고 허망한 무력함의 자리는 나를 기도로 인도하는 자리가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시면서 자신의 영혼을 맡기시듯이 말입니다.

옛 복음성가 가사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노래가 있어요. 오늘 아침, 이 가사가 정말 신학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니까요. 우리 공동체의 요즘 기도 제목이 있죠. 미국에 있는 전도사님과 노아 가족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병을 고칠 수도, 딱히 상황을 바꿀 수도 없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못 하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말이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고, 우리의 할 일을 만드시고, 또 믿음의 확신을 주시죠. 그렇게 기도할수록 확신과 믿음이 생겨야 합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그저 바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기도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기도를 통해 은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기도를 통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니까 확신이 생기거든요. 그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기도하세요. 먼저 무기력하게 하시는 때에 감사하세요. 그때가 기도할 때이고, 그때가 기적을 보게 될 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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