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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88 -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복음21:20-25)

4월과 함께 요한복음을 마칩니다. 이번 요한복음은 저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듬뿍 던져준 시간이었습니다. 읽을수록 재미있고, 또 새롭게 다가오는 말씀들이 신선한 충격을 주시고 했고요. 여러분은 어떠셨는지 모르겠네요. 말씀 묵상에 무슨 규칙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느끼는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 같아요. 마치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마지막 끈을 잡고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말씀도 놓치지 않고 매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때론 막히고, 때론 이해되지 않아도, 그래도 말씀의 끈을 놓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 필요한 듯 보여요. 저는 목사지만 매일 새벽 말씀을 묵상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부족한 지혜에, 졸필로는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아요. 그래도 매일을 놓치지 않고 말씀 앞에 서면, 말씀이 나를 이끄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매일 묵상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후반부에 들어와 저는 믿음의 주체가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 메시지는 요한복음 21장의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대화에서도 드러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종지부를 오늘 본문에서 찍네요.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받은 베드로는 곁에 제자 요한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는 어떻게 되느냐? 묻죠. 이는 남에 대한 배려일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명을 받았지만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것은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물음인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상황을 다 성경에 담지 못하는 특성에 의하면 이 베드로의 질문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은 특별히 이 베드로 질문을 언급합니다. 이는 그 질문으로 인한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입니다.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통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무 매정하리만큼 쏘아붙이는 듯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마치 ‘니나 잘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이는 베드로와 요한을 분리하려고 하시는 것도, 또한 베드로에게 너만 생각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정말 하고자 하신 말씀은 그다음에 나와요. 그것은 이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이는 눈으로 보이는 어떤 현상도,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어떤 행운도 아닌, 오로지 예수님의 길만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는 나의 사명이 있고, 다른 이에게는 다른 이의 사명이 있다는 뜻이죠. 그러니 비교하며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는 이런 축복을 받았는데, 나는 왜 없느냐?’는 식의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뜻이죠. 우리의 생김새가 각각 다르듯,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다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작가 김우현 씨의 책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 등장하는 최춘선 할아버지는 매일 맨발로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죠. 인터뷰어가 그에게 자녀가 몇 분이냐고 물어요. 다섯이라고 대답하자 인터뷰어는 그 자녀들이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맨발로 다니시면서 전도하는 것을 말리지 않느냐고 물을 때 이런 말을 하시죠.

“그 누가 시켜요. 그 누가 말려요. 사명은 각자 각자입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너는 나를 따라라’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수많은 말들이 넘쳐도 ‘너는 나를 따라라’ 누구는 흥하고, 누구는 망하고, 누구는 높아지고 누구는 배불러도 ‘너는 나를 따라라’ 저는 이 말씀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핵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의 사명은 각자 각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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