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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82 -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요한복음20:1-10)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장사되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이 마련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를 예수님의 고난의 과정과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현장에서 목격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그 광경까지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덤의 장소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말이죠.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습니다. 놀란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찾아서 이를 알리죠. 베드로와 요한은 단숨에 달려갑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시신이 탈취되어 훼손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을 테지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치 달리기 시합을 중계하는 듯한 내용이죠. 같이 뛰었는데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합니다. 젊어서였을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무덤 안에 더 먼저 들어가죠. 연륜이 있어서였을까요? 지금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셧다운 상태잖습니까? 어제 장로님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나이 든 노인에 대한 치료를 포기했다고요. 나이가 들면 병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젊은 사람보다 희박하기 때문에 의료체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포기했다는 거죠. 코로나19로 의료시스템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시스템이 마비되어가는 것 같아 보입니다. 생명에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생명은 그저 생명일 뿐입니다. 나이란, 그 연수에 맞게 맡겨진 사명과 능력이 있습니다.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죠. 그 쓰임에는 우리의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월은 우리가 주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죠. 그것을 가지고 자랑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다 소용 있게 하시는 것이니까요. 생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만큼 우리의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만 가치 있다는 것이죠. 젊어도 쓰임 받지 못하면 방종이고, 늙어도 쓰임 받지 못하면 노쇠하고 고루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은 여러 차례 강조를 하는 것 같아요. 마리아도, 베드로도, 그리고 요한도, 예수님께서 다시 사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죠. 특히 그들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셔서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주고야 도마는 엎드리죠. 그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 20:29,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에 근거하여 곱씹어 보면, 그저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확한 워딩은 이런 것 아닐까 싶어요. “네가 본다고 믿을 것 같으냐? 보고도 못 믿는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처럼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꼭 확인하고야 확신하나요?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나서야 사랑하십니까?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것을 보고서야 나도 그에게 마음을 엽니까? 상대가 어떻든, 세상이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삶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라도, 그저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잘해줘도 떠납니다. 사랑해서 모든 것을 내어줘도 모릅니다. 세상은 그래요. 그렇다고 그 반응에 나의 삶을 맡길 수는 없잖아요? 그저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외로운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그 외로운 길을 함께 동행해 주시는 주님과 걷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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