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81 -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는 누구입니까?(요한복음19:31-42)

오늘 본문 첫 구절에서 한동안 눈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 곧 오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빨리 죽이려고 하죠. 안식일에는 시체를 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충격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사람을 빨리 죽이려고 하는 모습이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에요. 더욱 충격은 그 모습이 별반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우리는 나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남들을 짓밟았을까요? 나와 다른 종교나 신앙을 적대시하고, 저주하는 일들이 우리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언젠가 뉴스에 나온 이야기인데요. 주일에 교회 예배를 위해 모인 교인들이 주택가에 주차를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민과 마찰이 있었는데요. 문제는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웠다는 것이죠. 거룩한 예배를 위해 나와 다른 남과 싸우는 모습이 과연 거룩한 신앙인가 싶습니다.

이에 비교되는 두 사람이 등장하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인데요. 그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모두 고위 공직자였죠. 정교일치의 사회였던 유대에서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기도 했습니다. 그 종교라 함은 유대교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제자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죠. 고위 공직자로서 당시 천한 신분의 예수님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개념을 뛰어넘는 생각을 가진 것은 더욱 신기합니다. 좋게 말해서 그렇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배교주의자인 셈이죠. 그런데 그들은 그런 공통점뿐만 아니라 다른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자신들의 생각을 숨겼다는 것이죠.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무서워서 숨겼는지, 아니면 불이익을 받을 것을 두려워 숨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둘 다였겠죠. 그런데 오늘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들의 생각과 신념을 숨기더니 예수께서 죽으시니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달리 말하면, 어떤 기대를 예수님께 했다면 그가 살아계실 때 적극적이어야 했겠죠. 오히려 예수님께서 죽으신 상황이라면 아무런 기대도 혜택도 없을 텐데 그들은 거꾸로 행동합니다. 게다가 불이익이라면 이때가 더 위험하고 두려웠을지도 몰라요. 예수께서는 반정부 인사로 처형을 당하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자들도 다 뿔뿔이 흩어진 것 아닙니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그런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요. 어쩌면 오늘 제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없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이었어요.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영상예배로 주일공동체예배를 드리고 있죠. 가족끼리 모여 예배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혼자 예배하기도 합니다. 비단 이 예배뿐만이 아니죠. 매일 아침 묵상하기로 주님과 약속한 이들도 있을 거예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장소,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나 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때, 나는 과연 여전히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질문이 오늘 제 마음에 주신 말씀처럼 들립니다. 보이는 곳에서는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인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나의 모습이 다르다면, 그것은 무소부재하시고 언제나 눈동자처럼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모습인지도 모르죠.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는 누구일까요? 혼자 있을 때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이 나를 결정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의 습관과 결정이 나를 가를지도 몰라요. 우리가 모이지 않고 집에서 각자 예배하여도 하나님께 예배하듯 예배하는 우리이길 빕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듯 삶을 사는 우리이길 빕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