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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76 - 나만의 거룩은 없습니다.(요한복음18:28~32)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던 예수님은 이제 로마 총독 앞으로 끌려갑니다. 총독 빌라도와의 대면이 이루어지죠. 아무리 자치정부의 형태를 띠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은 엄연히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예수님의 처형을 위해서는 총독의 재가가 필요했을 테지요. 결국 빌라도의 판결로 예수님의 사형은 결정되는데요. 오늘은 그 과정 가운데 유대인 지도자들이 보여준 이중성에 대해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 끌려가신 때는 유월절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중요한 명절이죠. 마침 오늘이 이스라엘의 유월절 종료일이군요. 유월절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조금 더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표를 문설주에 바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권세가 넘어간다는 의미의 유월절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정결한 날로 지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표로 거룩한 행실과 예식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를 고소한 유대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 관저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을 접촉하는 것이 자신들의 거룩함에 저해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죠. 이는 한마디로 거룩을 논하면서 자신들에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자신들의 권력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죽이는 이중성입니다. 자신의 손은 더럽히지 않으면서 남의 손을 빌려 코를 풀고자 하는 야비함이죠. 내면의 더러움을 간직한 채로 보이는 것에만 깨끗함을 드러내는 풍조가 그들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모습을 빌라도마저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라고 말하죠.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 멋대로 하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의 이중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말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세상의 미움을 품고 있고요. 주님께 맡긴다고 하면서 우리 속에는 잔꾀들이 즐비합니다.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 나의 욕심을 위해 일하고, 하나님을 입으로 외치면서 나와 다른 이들은 저주하는 이중성이 우리 안에 넘쳐나죠. 특별히 교회에 독실할수록, 신념이 강할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주님을 빙자하며 나를 믿고 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하나님을 앞세워 나의 유익을 구현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부르며 추구했는지도 모르죠. 유대 지도자들처럼 말이죠.

나만의 거룩은 없습니다. 진정한 거룩은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요. 진정한 거룩은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서로 사랑이 거룩이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맡기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주님을 위해 내가 죽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 거룩을 주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채우셔서 일으켜 세우시는 능력이 부활의 능력이죠. 나만의 거룩에 빠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만의 종교에 머물지 않기를 원해요. 내가 믿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고, 내가 이룰 목표는 나의 욕구가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잘됨이죠. 오늘도 나 홀로의 거룩이 아니라 이웃에게 예수가 생각나게 하는 거룩을 지니시는 우리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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