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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74 -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요한복음18:1~11)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의 기술과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겟세마네의 기도가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17장에 기록된 제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겟세마네의 기도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따라서 겟세마네라는 장소도 등장하지 않는데요. 오늘 본문에 보니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서 동산으로 가셨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그곳이 겟세마네 동산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도 공관복음의 기록과 약간의 차이가 있죠? 아무튼 그곳에서 대제사장이 보낸 로마 병사들과 마주합니다. 로마 병사들이 꽤 많이 왔던 것 같아요. 3절에 ‘군대’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적게는 100여 명에서 많게는 600명에 이르는 부대 단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로마 쪽에서는 예수님을 민란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군대를 동원할 만큼 위협 수준의 민란 세력이라는 것을 어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군대를 가룟 유다가 데리고 왔다는 점이에요. 마치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증인으로 동참하는 셈이죠.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가 이 동산을 잘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죠.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여러 차례 찾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가룟 유다는 로마 병사들을 몰고 그 길을 다시 걸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죠. 예수와 걸었던 똑같은 길을 이제는 로마 병사들과 걷습니다. 여기서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다 똑같다고요. 겉 환경과 상황은 똑같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 안에 품은 마음이 다른 거죠. 똑같은 길을 걷지만 다른 생각, 다른 마음이 결국 다른 결과를 내는 것이라고요. 문제는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품었는가 하는 점이죠.

오늘 본문은 또 다른 ‘다른’ 마음을 품었던 사람을 주목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요. 그는 베드로입니다. 무장한 군대가 와서 예수를 잡으려 하자 베드로는 자신의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요. 베드로는 왜 칼을 차고 있었을까요? 혹시 무장 혁명을 아직도 꿈꿨던 것일까요? 백 번 양보해서 그물 깁는 데 사용했던 칼이라고 치자고요. 그런데 예수를 따랐는데 왜 칼이 필요했을까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키는데 칼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일까요? 기특한 생각일까요?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것일까요? 우리들도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을 품을 때가 많죠.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이 전부라고 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떻게 사랑만으로 세상을 바꾸냐?’ 이런 마음을 품죠. 아무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 입으로는 아멘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방법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며 궁리를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은 길을 걸으면서 딴생각하는 가룟 유다처럼 말이죠. 마치 지배가 아니라 죽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복하면서 자신은 무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17장에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이 동의했다는 말이죠.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죠.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간구하시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을 붙잡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 분명히 밝힐 것이 있습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이제 나의 뜻은 전혀 펼칠 수가 없구나’ 물론 자신을 완전히 주님 앞에 복종케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았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내가 불필요하다는 뜻도, 나의 생각이 없어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각도 주시고, 의지도 주셨는데 그것이 다 불필요하다면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잖아요? 이를 조금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수영을 배워보신 적 있으신가요? 처음 수영을 배우면 하는 일이 있죠. 물에 몸을 맡기라는 말입니다. 수영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물을 무서워하기 때문인데요. 물이 무서우면 자꾸 스스로 어떻게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물에 가라앉고 그러죠. 그래서 몸에 힘을 빼고, 물에 자신을 맡기라고 하죠. 그러면 이상하리만큼 몸이 물에 떠요. 발버둥을 칠수록 가라앉던 몸이 자연스레 뜨죠. 살겠다고 얼굴을 쳐드는 순간, 물에 빠지는데, 에라 모르겠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얼굴을 물에 묻으면 몸이 떠요. 이게 맡기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수영은 물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물에 몸을 맡길 줄 알면 그제야 내가 할 일이 생기죠. 팔을 저어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발을 차 속도도 내고 방향도 조정하죠. 내가 원하는 대로 갑니다. 이것이 맡기는 거예요. 이는 출애굽 해서 주님께 맡기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드리는 광야의 생활과 같아요. 그러나 광야에서 끝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는 내가 일하고, 내가 꿈꾸고, 내가 삶을 실현하죠. 이게 다 맡기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께 맡길 줄 알아야 그다음 나의 일이 생기고, 나의 뜻이 쓰임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온전히 안 후, 자신의 재능대로, 자신의 생긴 대로 사역을 해 나가듯이 말이죠.

우리의 생각, 뜻, 성격, 성질에 이르기까지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분명히 생긴 대로 쓰임 받습니다. 문제는 내가 맡기지 못한다는 점이죠. 물에 나의 몸을 던지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무기를 버리고, 나의 예측을 버리고, 내가 설정한 세상 바꾸는 법을 버리고, 주님의 방법을 선택할 때, 그제야 우리의 생김새 그대로가 쓰임 받는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을 믿는 것, 주님의 방향을 믿는 거예요. 그렇게 믿고 맡길 때 우리의 뜻과 마음과 생각이 쓰임 받습니다. 우리의 것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주님이 쓰실 때 말이죠. 오늘도 주님이 나를 쓰시도록 믿고 맡기시길 빕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선언해 보세요. 그 위에 나의 모습이 쓰임 받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이 주셨다고 믿는 믿음 위에 나를 던져 보세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 안에 거하는 오늘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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