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요한복음묵상

요한복음서묵상79 - 함께 있어서 사랑입니다.(요한복음19:16~27)

오늘 본문은 여러 사건이 나열되어 있네요.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대인들 손에 넘겨주었고, 이는 곧 처형을 허락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처분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바로 골고다로 예수님을 이끌죠. 그 고난의 과정을 사도 요한은 짧게 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희롱이 있었고, 그 희롱마저 서로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윗사람들은 문구 하나로 싸우고, 아랫사람들은 옷 하나로 싸우죠. 어쩌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추악함은 희생양 하나를 짓밟는데 자비란 없습니다. 육체의 아픔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마저 할 수 없게끔 잔인한 난도질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이기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러 사건보다 오늘 저에게 들어온 말씀은 뜻밖의 것입니다. 십자가 근처에 있는 이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등장시킵니다. 그 말씀이 어머니와 제자 요한을 연결시키는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작게는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챙기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고, 조금 넓게는 우리의 가족 관계를 혈연이나 지연에서 조금 더 넓혀 모든 이들을 어머니로, 모든 이들을 아들로 삼는 사랑의 지평을 넓히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지경을 넓히는 방법이 바로 이웃사랑이고, 더 넓은 가족을 만드는 셈이죠. 

그런데 왜 하필 사도 요한이었을까요? 그가 사랑받는 제자여서요? 그렇다면 왜 그가 사랑받는 제자였을까요? 나이가 가장 어려서요? 손이 많이 가는 귀여운 제자여서요?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사실이 오늘 이 시간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그가 늘 곁에 있었던 제자였기 때문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요한은 언제나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간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뿔뿔이 흩어졌을 때, 사도 요한은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쫓아가죠. 그것도 불안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하는 베드로를 이끌고 말이죠. 어쩌면 가장 스승의 곁을 지켜야 할 시간인지도 모를 그 골고다 언덕에 유일하게 서 있는 제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사랑받았던 이유는 그의 성격도 성품도 아닙니다. 성품으로 치면 고약하리만큼 난폭한 자가 요한이죠. 그런데 그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그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곁에 있었던 때문입니다.

아무리 친해도 ‘그때’ 같이 있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그때’ 같이 있지 않으면 필요 없어요. 같이 있어 주는 사람이 친한 것이고, 같이 있어 주는 이가 ‘가족’인 겁니다. 혈연이 아니고요. 아마도 베드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머니를 소개했겠죠. 이전에 아무리 가까웠어도, 이전에 아무리 친했어도, 가족이어도, 친구여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지금 ‘함께’하는 이가 친구고, 가족이고, 관계이니까요. 예전에 아무리 잘하면 무엇합니까? 예전에 친했으면 무슨 소용인가요? 지금은 아니라면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뭔가 줘서 사랑이 아닙니다. 함께 있어서 사랑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함께하고, 늘 곁에 있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간을 꺼내 줄 만큼 마음이 있어도, 그 자리에 없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에요. 그러니 늘 주님의 곁을 지키세요. 이해 못 할 일도, 모르는 일도 있습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을 때도, 힘겹고 귀찮을 때도 있죠. 그래도 곁에 있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무것 하지 않아도, 아무 도움 없어도, 아무 힘없어도 곁에 있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능력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늘 그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