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2. 22:29ㆍ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인간에게는 종교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자에게 향한 경외심은 종교관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본능입니다. 바울은 롬1:19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피조물에게도 없는, 이 신에 대한 지식이라고도 말하는 이 종교성은, 첫 사람이 범죄 하여 타락할 때, 함께 그 가치를 잃었습니다. 크게 2가지를 잃었습니다. 하나는, 종교성은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잃었고, 또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치를 잃었습니다.
타락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에서 육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았고, 타락은 우리의 가치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들로 두게 하였습니다. 타락은,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이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꾸어버려, 우리에게서 이상과 비전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변질된 종교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인 줄 착각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거듭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변질된 종교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종교성의 거듭남 없이는 우리의 신앙은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성은 언제나 보이는 것에 대한 미련을 갖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거니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결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종교성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바울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영적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보이는 육신보다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의 중요성을 아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욱 강하신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변질된 종교성은 끊임없이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세상의 논리가, 그 변질된 종교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에도 우리 안에 종교성은 존재합니다. 다만 모든 것이 그렇듯 종교성도 변질되어 존재합니다. 변질된 종교성은 보이지 않는 신을 보이는 신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신상들, 우상들입니다. 타락 이후 모든 민족에게 전해오는 신상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든 모든 것들은, 제 아무리 무슨 이름을 붙인다 하여도 다 우상입니다.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모세시대의 금송아지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 때 그 금송아지는 다른 신이 아니었습니다. 바알도, 아세라도 아닌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을 대신한 것입니다. 왜 금송아지로 만들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미로 보면 금과 송아지는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강한 의미를 지니므로 하나님을 송아지 따위에 비교한다는 문제제기는 유치합니다. 문제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잃은데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늘의 가치, 하늘의 원리를 세상의 눈, 세상의 원리로 바뀌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모든 민족이 보이는 신을 만들 때, 이스라엘은 어떤 우상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는 법궤가 있을 뿐입니다. 법궤에는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이는 신에 열광하고, 보이는 신앙에 열정을 다하며, 보이는 숫자와 크기에 가치를 둘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말씀에 가치를 두라고 이스라엘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삶은, 드러난 삶의 결과보다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생각이 주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로 우리를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내기에는 실수가 많은 존재이고, 방해하는 세력도 주위에 넘쳐납니다. 결과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우리에게 결과란 하나님이 주시는 보너스입니다. 하나님은 결과 이전에 우리 안에 어떤 생각과 어떤 꿈, 어떤 신학이 있는지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말씀이 사라지면, 보이는 우상에 빠집니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과 신학이 사라지면, 눈에 보이는 결과와 현상의 우상에 빠집니다. 우리가 보이는 우상에 빠지는 이유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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