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218 - 열려 있어야 합니다.

2026. 6. 21. 13: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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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1~5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유대 사람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자기 관례대로 회당으로 그들을 찾아가서,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토론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당하시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해석하고 증명하면서 "내가 여러분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6월 셋째 주일, 초여름의 푸르름이 짙어가는 아침입니다. 한 주간 지고 온 짐들을 잠시 내려놓고 이렇게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나아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축복을 전합니다. 오늘 하루, 받은 은혜로 새 힘을 얻으시는 복된 주일 되시기를 빕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험한 일을 겪고도 바울은 다음 성읍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자기 관례대로" 회당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토론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같은 회당에서 같은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똑같은 메시지를 듣고도 사람들의 반응이 둘로 갈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이 움직여 바울을 따랐고, 어떤 이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2절의 "토론하였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디알레고마이(διαλέγομαι)입니다. 일방적으로 외치는 선포가 아니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풀어가는 대화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4절의 "승복하였다"는 페이쏘(πείθω), 즉 마음이 움직여 동의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말씀이 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먼저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5절의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시기심이었는데, 시기심은 이미 닫혀 있는 마음입니다. 닫힌 문 앞에서는 아무리 좋은 손님이 와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일본의 사상가 스즈키 순류는 "초심자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많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습니다. 오래 믿었다고, 많이 배웠다고 마음이 더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미 안다"는 확신이 쌓일수록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는 줄어듭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 들으려 하기보다 더 단정하려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식물학에는 '춘화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씨앗은 일정 기간 추운 시기를 거쳐야만 비로소 꽃을 피웁니다. 추위를 피해 따뜻한 곳에만 두면 오히려 꽃을 피우지 못한답니다. 우리 인생의 시련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추운 계절 앞에서 마음을 닫아버리면,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가능성도 함께 닫혀버립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는 어떻습니까? 직장에서 후배가 나와 다른 방식을 제안할 때,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듣지도 않고 거절하지는 않습니까? 가정에서 자녀가 우리 세대와 다른 생각을 말할 때,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틀렸다고 단정하지는 않나요?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은혜의 통로, 낯선 섬김의 자리가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신중함이라 포장하지만 사실은 변화가 두려운 것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닫혀서 더 이상 배우지 않고, 자기 경험과 방식만 옳다고 믿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꼰대"라 부릅니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의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거부는 쉽습니다. 마음을 닫는 데는 아무 용기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처받을 줄 알면서도 마음을 여는 사람, 실패할 줄 알면서도 다시 시도하는 사람이 결국 더 멀리 가고 더 깊어집니다.

같은 말씀이 누구에게는 생명이 되고 누구에게는 소동의 이유가 됩니다. 그 차이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하루, 두려운 소식 앞에서도 기쁜 소식 앞에서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그래서 끝까지 배우고 끝까지 사랑하는 더 큰 사람으로 자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ttps://youtu.be/mXVLoFU-B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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