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서묵상일기 382 - 우리의 눈을 열어 주소서.

2025. 8. 31. 13:29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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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24:13~16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절망의 길 위에서 만난 낯선 동행자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서 마지막 장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23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했고, 24장에 들어서는 부활의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 부활의 첫 증인이 여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당시 사회적 인식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하나님 나라는 힘 있는 자들이 아닌, 평범하고 오히려 연약한 자들에 의해 세워지는 나라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낮은 자를 들어 올리시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며, 미련한 자로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과도 일치하죠.

부활의 첫 증인인 여인들은 달려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죠. 제자들도 당시 여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여인들의 말을 “어처구니없는 말”, 그러니까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하기까지 했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으로 보이죠. 사실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이유는 절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희망을 걸고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에게, 지난 며칠은 끔찍하리만큼 참담한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선생이셨던 예수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으로 잔득 기대에 찼던 그날의 환희는 한순간에 사라져버리고, 급기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한껏 고무되었던 제자들은 오히려 쫓기는 도망자의 처지가 되어 버렸죠. 이것이 단 며칠만의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더 잔인하게 말하자면 생명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렇게 터벅터벅,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약 11킬로미터나 되는 그 길을 걸어가며, 그들은 깊은 절망의 탄식을 내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의 눈은 가려졌을까?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와 함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은 아주 이상한 말을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서 24: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저는 이 구절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장면인데, 굳이 눈이 가려질 이유가 있을까요? 못 알아보았다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언가에 의해 시야가 차단된 것 같은 이 표현에는 분명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묵상을 거듭하며, 그 이유가 바로 그들의 마음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제자들은 이미 여인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직접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여러 번 하셨죠. 천사들도 여인들에게 “전에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눅 24:6)라고 상기시켜 주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말씀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왜 그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못했을까요? 왜 여러 차례 들었던 말씀을 떠올리지 못했을까요? 이 부분을 우리는 지난 금요일 아침 묵상에서 나눴죠. 이는 당시 제자들이 극심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자신들에게 전부였던 스승이 힘없이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자신들은 배신자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요. 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 못 할 절망감이 그들의 온 마음을 뒤덮었을 테죠.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내 뜻과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낙담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이 굳게 닫히고 시야가 급격히 좁아집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주변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죠. 누군가 진심으로 위로해도 그게 들리지 않아요. 심지어 조롱이나 동정처럼 느끼기도 하죠.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건네는 조언도 그저 짜증나는 잔소리로만 들립니다. 이런 ‘멘붕’ 상태에서 어찌 차분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낼 여유가 있겠습니까?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아무 생각이 안 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오직 화만이 가득하고 입에서는 거친 말이 터져 나오게 되죠. 그렇게 원치않는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눈이 가려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영적, 심리적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절망이라는 짙은 안개가 우리의 눈을 가려, 바로 곁에 와 계신 주님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문제에만 빠져서, 그 문제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도 함께하시는 주님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진짜 위로는 바로 그다음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죠? 이는 그들이 알지 못했을 뿐, 바로 그 절망의 길 위에서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나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의 아픔에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응답하셨으나 우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겁니다. 우리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죠? 주님마저 나를 버린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떠나신 것이 아니라 내 눈이 가려져 나와 함께 하심을 알아보지 못한 거예요.

세상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주저앉아버린 바로 그 자리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와 함께 걸어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해도, 우리가 원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 곁에서 끝까지 함께 하시죠. 이는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 그대로 입니다. 

창세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을 당시 야곱은 어떤 처지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털이로 광야에 내몰린 상태였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다니는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 최악의 상태에서 이 말씀을 듣는 겁니다. 

이사야서 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이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인데요. 당시 이사야는 또 어떤 상태였을까요? 그는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잃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죠. 유대 사람들은 산산히 흩어지고 신앙의 백성이라는 말이 무색할만큼 회의적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선지자 이사야는 무기력했어요. 마치 교인들이 다 떠난 교회의 목사처럼 그야말로 인생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서 28:20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며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이었죠. 이 약속은 우리의 상황이나 감정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절망의 가장 깊은 골짜기를 지날 때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할 때 더욱 힘을 내야 합니다. 절망이 몰려올 때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일어나야 하죠. 

더 나아가, 주님은 그 절망의 자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말을 거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성경 말씀을 풀어주시며 닫혔던 그들의 마음과 눈을 서서히 열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골고다의 죽음이 끝이 아니듯 우리의 절망도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부활의 새로운 역사를 쓰시듯이 오히려 우리의 낙심과 절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가장 가까운 자리가 되고, 가장 아팠던 상처가 다른 이를 치유하는 능력이 되는 역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절망의 밑바닥을 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는 순간

그렇다면 절망의 안개에 가려졌던 그들의 눈은 언제 열렸을까요? 말씀을 계속 따라가 보면, 우리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낯선 동행자에게 함께 머물기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나누죠. 그때 예수님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경은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눅 24:31)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중요한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닫힌 눈이 열리는 순간은, 절망의 길 위에서 수동적으로 걷기만 할 때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머물며 교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을 때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영적인 교제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설 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뜻이죠.

우울할 때 우리는 더 깊은 동굴로 숨어들고 싶어 합니다. 아플 때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기도 하죠. 상처받았을 때 혼자 있고 싶다며 모든 관계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힘들수록,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동굴에서 나와야 합니다. 혼자 있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고, 소리 내어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해야 합니다. 말씀을 펴서 읽기를 즐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기들의 집에 모셨던 것처럼, 우리도 의지적으로 주님을 내 삶의 중심으로, 내 교제의 중심으로 모셔야 합니다. 

제 목회 경험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교인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고, 숨기고, 쉬쉬하는 이들이 있어요. 꼭 이렇게 이야기하죠. ‘목사님만 알고 계세요.’ 그렇게 숨길거면 왜 나한테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신비주의 전략을 펼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꼭 문제만 생기면 안 보입니다. 다 해결되어야 나타나죠. 기도제목을 나누는 법도 없어요. 저는 이것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왜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기 위해 함께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분들은 공동체를 마치 나의 적으로 바라봅니다. 나를 비방하고, 무시하고, 경쟁하는 것처럼 여기죠. 그러다보니 내 문제를 나누지 못해요. 그런 분들 주위에는 기도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 줄 사람도 없어요. 

아플수록 함께 모여야 합니다. 힘들수록 더 드러내야 해요. 병은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왜요? 그래야 고치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이죠.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동굴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하고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교제하며 말씀과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던 절망의 껍질이 벗겨내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내 곁에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길 위에서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오늘 본문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말씀 속에서’글로바'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그것으로 정확히 존재를 파악할 수가 없죠. 게다가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 이름 없는 한 사람이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당신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절망 속에서 옛날 삶으로 도망치듯 돌아가고 있는 그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 위에 서 계신 분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낙담하며 주저앉아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 남아 있는 모든 힘과 믿음을 모아 나를 끌어 올려야 합니다. 어두운 동굴에서 나를 끌어내 더욱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 나를 위해 일하시는 주님을 알아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아 탄식만 하고 있으면, 우리는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여시는 새로운 희망의 길을 걸을 수 없고,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절망적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어두울수록 빛을 향해야 합니다. 슬플수록 기쁨을 노래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기도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하고, 많은 조언을 들어야 합니다. 내 안에 갇혀 있지 말고 말씀의 통로를 열어야 해요. 그때 우리의 눈이 떠집니다. 그때  우리 곁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절망의 안개가 걷히고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걷고 계셨던 부활의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절망은 희망이 되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주님의 손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엠마오 길 위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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