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묵상일기 23 -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나는 세상을 바꾸실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죠.

2023. 5. 17. 06:50묵상하는말씀/요한일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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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12   자녀 된 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일 더위가 기승을 부리네요. 벌써부터 이러면 한 여름은 어쩌나? 싶기도 한데요.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더우면 더워서 짜증, 추우면 추워서 불평을 늘어놓았었죠. 그런데 우리는 바꾸기로 했잖아요? 여름에는 당연히 더워야 하고 겨울에는 또 당연히 추워야 하죠. 그런 이유들이 다 있으니까요. 그래서 불평보다 기뻐하기로 했습니다. 더우니까 이제 수영도 할 수 있겠구나~ (참고로 저는 수영을 못합니다^^) 시원한 수박도 먹을 수 있겠지? 찾아보면 좋은 일들이 많죠. 그것을 떠올리며 여름을 축복하려고요. 그러다 보면 여름은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오늘 또다시 사도 요한은 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말하죠. 이 말은 계속 반복한다고 제가 이미 말씀드렸죠? 앞으로도 계속 등장하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다 다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들이 계속 변하죠. 지금까지 그는 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본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라는 말로 시작해서, 기쁨을 주기 위함이고,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또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계속 말이 바뀌었습니다. 이쯤 되면 모든 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될 것 같아 보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다른 말씀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야 합니다. 그러니까 생명과 기쁨, 죄에서 벗어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다 같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죠. 이미 우리는 그렇게 묵상했죠?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는 일, 내가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일이라고요. 그것이 하나죠. 또한 내가 주님에 대한 기억과 기대를 가지고 좋은 생각과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나를 빛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죄를 물리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죄를 묵상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바 있죠? 이는 마치 어둠을 물리치려는 모습과 같죠. 어둠과 싸울 수 있나요? 어둠을 몰아낼 방법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어둠과 대결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둠과 싸우는 일은 어둠과 대면하는 일이 아니라 빛과 대면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내 죄가 얼마나 큰지 고백하는 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런데 그 인정과 인지가 필요한 이유는 내가 그만큼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죄를 자백케 하는 것은 자식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까발리기 위함이 아니죠. 그 자백이 필요한 이유는 그만큼 용서의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주님 앞에 나를 드리고 맡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죠. 그런데 우리는 죄의 고백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분의 자녀로서의 권리를 알려주지는 못하는 것 같죠.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서 갖는 은혜와 축복의 권리를 주장하면 마치 인간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는 줄 알고, 또 인간 스스로가 버릇 없어지는 줄 아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차 오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외치죠.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라고 말이죠. 그는 죄의 용서를 과거형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죄는 사라졌다고 말이죠. 이는 앞으로 살 날들의 죄까지를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는 한 우리에게 이제 죄는 더 이상 올무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묵상해야 할 것은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뿐이죠. 우리에게 잘못될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들에 대한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늘 두 갈래 길이 있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길과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는 길이 늘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든 길이 내가 원하는 대로 열리지는 않죠. 그리스도인이라고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앞일은 누구도 알 수 없죠. 그러나 우리는 기대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죠. 그 기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희망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간구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죠.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정령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죠. 그래서 저는 믿음으로 선택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두 갈래 길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확률이 현저히 떨어진다 해도, 가능성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심지어 가능성 제로라 해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저는 주님께 외치렵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믿고 간구하려고요. 제 안에는 불가능이 없는 하나님의 권세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요. 내가 기적을 이루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바꾸실 능력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죠.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기적의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그래서 그 자격으로 끝까지 좋은 것을 기대하려고요. 숨이 다하는 날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고요. 그것이 제가 가진 가장 위대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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