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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후서묵상일기

고린도후서묵상일기 01 - 낙담하지 마세요.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부터 고린도후서 말씀을 함께 묵상합니다. 고린도전서에 이은 말씀묵상인데요. 이 두 권의 책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외에 이 두 책은 여러 가지로 사뭇 다르죠. 먼저는 바울의 필체가 다르고, 주제에 있어서도 교리적인 가르침보다는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내용들이 더 많습니다. 이는 아미도 상황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몇 안 되는 기록을 가지고 역사의 과정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들을 쫓는 것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죠. 그래서 학자들은 이 글이 나온 배경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아마도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는 바울에게서 커다란 감정적인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하는데요. 명확하지는 않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 때문에 많은 아픔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이미 편지를 보낸 바울이죠. 고린도전서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 바울로서는 낙심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가 전달된 이후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바울이 가짜다'는 말이 퍼진 것이죠. 이 때문에 바울이 부랴부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 방문은 안 가느니만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아무런 해결을 못하고 마치 쫓기듯 빠져나왔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얼마나 불편했을까요? 마치 뒤처리를 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믿었던 형제들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자신에 대한 뒷말은 차치하더라도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못한 자괴감은 어땠을까요? 다른 곳에서 전도여행을 하는데도 늘 마음은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그 과정에서 바울도 낙심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마음을 다 읽을 수는 없지만 바울도 낙심하고 절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어쩌면 이런저런 배경이나 형식 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를 다시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물의 편지라고 명명된 이 편지는  이름만 있을 뿐 실체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은 알 수 없죠. 

 

그런데 그 편지가 기적을 일으켰던 것 같아요. 감사하게도 직접 가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들 내부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바울에 대한 불신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죠. 그 소식을 듣고서 기쁨을 감추지 못한 바울이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진심을 전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고, 오해는 쌓이고, 일은 꼬여만 갈 때가 있죠.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요. 진심을 다했으니 맡기는 수밖에요. 뭔가 하려다가 꼼수가 되고, 내 힘으로 바꾸려다가 무리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낙담될 때가 있죠.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나의 진심은 반드시 힘을 발휘할 때가 있어요. 나의 기도는 언젠가 반드시 꽃 피울 날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펄럭이는 나비의 날갯짓이 어느 곳에서는 태풍으로 변하듯이 그저 기대와 감사로 이 낙담과 절망의 순간을 오로시 견디면 해결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주님의 도우심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어제가 끝이 아니었듯 오늘도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마지막은 아니죠. 오늘도 그런 기대감으로 출발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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