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43 -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리오!"

2020. 12. 8. 03:07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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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8:4~9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모여서, 라마로 사무엘을 찾아갔다.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른께서는 늙으셨고, 아드님들은 어른께서 걸어오신 그 길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사무엘은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장로들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렸더니,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한 말을 다 들어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하는 일마다 그렇게 하여,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더니, 너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이제 그들의 말을 들어주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권한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 주어라."


좋은 아침입니다.

코로나 19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불어나는 확진자들의 수를 보면서 코로나 사태가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현실감이 들기도 하네요.

어쩌면 그동안 우리는 행복한 환경에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나요?

그렇게 감사의 상황이 계속되면 당연한 줄 알게 되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감사의 장대비가 내려도,

감사로 여기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어쩌면 돼지 목에 진주 같을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아무리 우겨쌈을 당해도

감사를 잃지 않는 자에게는 낙심이 거할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감사가 상황을 이기고,

그래서 감사가 미래를 여는 것이죠.

 

오늘도 우리의 감사가 계속되길 빕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도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감사가 내 상황과 환경을 지배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무조건 좋게 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간혹 성경의 인물들을 자신의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보는데요.

편의상 정한 이름이야 자기 마음이지만

어느 때는 의아를 넘어 섬뜩할 때가 있습니다.

가령, 다윗(David)이라는 이름이 대표적이에요.

제가 아는 분만 해도 데이비드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분들이 많아요.

아마도 성경의 가장 유명한 인물인 데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칭함을 받는 인물이니 더욱 그렇겠죠.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가슴이 쪼그라듭니다.

그는 남자가, 아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범죄를 다 저지르죠.

일일이 입에 담기조차 힘든 끔찍한 범죄들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인생입니다.

물론 그런 그의 전과를 담아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겠죠.

아마도 모든 옛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그의 모습을 닮고 싶은 것일 거예요.

 

오늘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지도자로, 좋은 영성가로 그를 기억하고 싶지만

그가 완벽한 존재는 아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죠.

어제 묵상에서 사무엘이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는 일이 있었죠.

이는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자신이 해 버린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똑같은 일이 오늘도 벌어집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몰려왔습니다.

부당하고 옳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면 그 일을 제자리로 돌이키는 것이 순리인데요.

그들은 몰려와 한다는 말이,

사사로는 부족하니 왕을 달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하니,

인간으로는 부족하니, 인간을 달라는 말입니다.

말에 어폐가 있죠?

그런데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하며,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인간이 뽑은 최고의 인간으로 대신하자고 하는 말이니까요.

 

더 재미있는 것은,

사무엘이 이 말에 마음이 상했다고 했어요.

저는 이 말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모습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곱씹어 읽어보니 조금 다른 생각도 들어요.

혹시 '자신이 사사로서의 권위에 도전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이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셨어요.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죠.

정말 부드럽고, 인자하게 사무엘을 다독거리며 하신 말처럼 보이지만,

기실 이 말에는 깊은 뼈가 담긴 말이라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무엘은 오랜 시간 사사로 백성을 다스리다 보니 자신이 하나님이 된 듯 착각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제멋대로 아들들을 사사로 세우기도 했는지도 모르죠.

그리고 도전하는 백성들에게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하나님은 콕 집어서 말씀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다"라고 말이죠.

 

이 대목에서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과 같은 말이죠.

창세기 50:19의 말씀이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이 말은 요셉이 한 말입니다.

이제 노예에서 이집트의 총리가 된 후,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을 보며 한 말이죠.

형들은 권력자가 된 동생 요셉을 보면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자신들이 한 잘못이 있었으니까요.

혹시나 동생이 보복은 하지 않을까? 싶었겠죠.

되갚아 주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찐득하게 자리 잡은 비열한 심성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비루하고 간사한 본성이냐면,

복수심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통쾌한 정의로 포장하죠.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리오"

 

심판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정죄도 하나님의 몫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대신할 그 아무것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임을,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에서 이미 보여주셨죠.

 

우리는 세상의 심판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규정짓는 잣대를 휘두를 수 없습니다.

오직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권리밖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어요.

우리가 늙어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자아의 교만이 우리를 늙게 하고 눈이 멀게 하는 거예요.

이웃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어도,

그 권세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깨끗하고 정결한 세상을 꿈꾸는 사명을 주셨어도,

그렇다고 우리가 정죄하고 심판할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겸손이 답입니다.

늘 낮아짐이 사명의 기초이고요.

주신 권세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 앞에서 더 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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