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서묵상일기47 - 그분을 높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2020. 12. 12. 07:12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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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9:18~21   사울이 성문 안에 있는 사무엘에게 다가가서 말하였다. "선견자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였다. "바로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산당으로 올라가시지요.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저녁을 듭시다. 물어보시려는 것은, 내일 아침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흘 전에 잃어버린 암나귀들은 이미 찾았으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대가 누구에게 걸려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대와 그대 아버지의 온 집안입니다!" 사울이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의 모든 가족 가운데서도 가장 보잘것없는데, 어찌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한 주간 열심히 일하고 삶에 최선을 다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유로운 주말의 평안과 감사가 깃든 아침이기를 빕니다.

 

어릴 적에 동네마다 놀이터에는 시소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긴 널판지에 균형을 맞춰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구죠.

중학교 다닐 무렵이던가요?

이 시소라는 단어가 한국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소가 한국말이 아니라 영어(seesaw)였던 거죠.

 

그러고 보면 한국말인 줄 알았는데 외국말인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비닐이나 고무 같은 말들은 한국말 같지만 아니죠.

비닐(vinyl)은 영어고 고무(gomme)는 불어예요.

지로용지라는 말 많이 쓰시죠?

'지로(GIRO)' 또한 영어의 은행 상호 간 순환 시스템(General Interbank Recurring Order) 첫 글자를 딴 단어입니다.

'바자회'라고 할 때 쓰이는 바자(Bazaar)도 페르시아 어원을 가진 영어고요.

요즘 한참 뉴스를 달구고 있는 '백신(Vaccine)' 또한 한국어가 아닌 영어입니다.

참고로 호랑이의 호랑도 한자어입니다.

이는 제가 중국에 가서야 알게 된 거예요.
호랑이의 다른 말인 '범'이 순우리말이죠.

저는 그때까지 '범'이 한자어인 줄 알았다는 무식의 소유자였어요.

 

아무튼 시소의 어원은 여러 가지입니다.

단어를 보아하니 '보다' '보았다'를 반복하는 형태이니 시소에 딱 맞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원래 어원은 톱질할 때 쓰던 추임새 단어라고 하네요.

쇼우(saw)가 톱질하다는 뜻인데 거기에 '씨(see)'라는 추임새를 넣어서

힘을 주어 일하는 추임새 단어가 되었답니다.

우리말로는 '어기엉차' 같은 말인 셈이죠.

 

그런데 시소가 참 재미있어요.

한편이 내려가면 한편이 저절로 올라가고,

한편이 올라가면 저절로 한편이 내려가죠.

어느 것이 먼저냐?를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겸손에도 이와 같은 구분하기 힘든 것이 있죠.

나를 낮추는 것이 겸손인지,

남을 높이는 것이 겸손인지 구분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분명한 구별법이 있습니다.

경배라는 것이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말하는 데요.

이는 주님을 높이는 것이지 나를 낮추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낮아질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낮아지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죠.

어떤 이는 낮아짐을 자기 비하로 아는 이들도 있고,

때론 자존감이 낮은 것을 겸손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어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낮아지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를 낮출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높여야 우리가 낮아집니다.

주님을 인정해야 나를 인정하게 되고요.

주님이 일하심을 믿어야 나의 독단적 생각과 교만을 버릴 수 있어요.

 

그분을 높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에요.

나를 비하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는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직시한다고 해서,

아무리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서

겸손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그저 자신을 바라볼 뿐이죠.

 

겸손은 그분을 높이는데서부터 시작돼요.

그러면 나는 저절로 낮아집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은 나를 발견하듯이,

큰 역사 앞에서 작은 역할의 나를 보게 되듯이,

주님을 인정하고, 구주로 고백하며,

오늘도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그분을 높이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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