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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신명기묵상

신명기묵상88-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신명기 33:1-7

지난 2주 동안 토요일에 다림 멘토 교육이 있었습니다.
다림교육에서 교육재능 기부를 하기 위한 이들을 위한 사전교육이죠.
벌써 올해 다섯 번째 교육입니다.
30명쯤 되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나누고 봉사하겠다고 나섰죠.
저는 그 시간에 함께 할 때마다 벅찬 떨림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고, 돕는 마음은 늘 아름답기 때문이죠.
더더욱 이번 모임에서는 다림의 가치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유독 집중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더 따뜻해졌습니다.

멘토 교육을 할 때마다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곳 다림은 교육기관이 아니라고 말이죠.
누군가에게 교육재능을 나누는 자리이지만 사실 가르치는 교육적 내용이 엄청난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가르쳐도 다른 어떤 학원들보다 나을 수도 없고,
가르치는 아이들을 1등 만들 수도 없다고요.
우리는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는데 목표를 두지 않는다고요.
대신 다림교육은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버려지거나 상처 받은 아이들,
마땅히 받으며 자랐어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
그들에게 가족이 되어 사랑을 채워주는 일이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말이죠.
마치 엄마가 자녀 곁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며 돕듯이 말이죠.

이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고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릇이 있습니다.
물론 큰 그릇도, 작은 그릇도 있죠.
크기가 다를 수는 있어도, 그 그릇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그릇에 우리의 경험이 담기고, 우리의 지식이 담기죠.
그런데 그 그릇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느냐면,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제일 마지막 날 우리를 만드셨죠.
그리고 그다음 날 안식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안식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낳자마자 엄마의 품에 있듯이, 창조되자마자 주님의 품에 안긴 거죠.
우리의 시작은 사랑부터입니다.
우리의 기초는 사랑받은 것에서 출발하죠.
그렇듯, 우리가 가진 그릇은 사랑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긋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우리의 그릇이 변형되어 버립니다.
찌그러지거나 깨지거나, 혹은 오염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죠.
문제는 그 위에 우리의 경험과 지식 등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깨진 그릇에는 아무리 좋은 것이 부어져도 새고요.
오염된 그릇이라면 아무리 깨끗한 것이 부어져도 더럽혀지겠죠.
은혜가 오히려 상처로 자리 잡고,
똑똑한 머리가 오히려 악한데 사용되는 이유는 다름 아닙니다.
사랑받지 못한 후유증이죠.

신명기 34장은 12지파를 향한 모세의 축복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2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죠.
“주님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해처럼 떠오르시고, 바란 산에서부터 당신의 백성을 비추신다. 수많은 천사들이 그를 옹위하고, 오른손에는 활활 타는 불을 들고 계신다.”

위에 언급된 세 산, 시내산, 세일산, 바란 산은 광야 생활 40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들입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하늘에는 천사들이 덮으며,
따스함과 밝음과 실재적인 상징인 불이 있습니다.
마치 어찌 보면 요람과 같은, 거대한 품처럼 보이죠.
따스한 엄마의 품을 생각나게 하는 묘사입니다.
그리고 3절에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시작은,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다림에서는 아이들의 눈에 띄는 변화가 있습니다.
의기소침하고, 방어적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때론 배타적이기도 하고, 경계심을 드러나는 아이들도 있죠.
누군가가 다가가면 거부하기 일쑤고,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하면 뿌리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나요?
어떤 드라마에서 보니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처음이었어요. 나에게 4번까지 잘해준 사람은…”
상처로 얼룩진 주인공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요.
전과 기록이 있는 주인공의 실체를 알고는 떠난 사람들이 있는 거죠.
잠깐 잘해주었다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나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더 상처를 받았던 겁니다.

다림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점차 마음을 열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 주어지는 변화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제 좀 버릇없어지고, 까불고, 마음대로 하죠.
그러나 속으로는 마치 안전한 장소에서 마음 놓고 뛰어노는 아이들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학습능력이에요.
경계심 많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습득력이,
서로 믿고, 사랑을 느끼는 관계 속에서는 너무도 커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의 그릇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그릇에 있어요.
그 그릇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림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요.
어떤 모습이어도 받아들이고, 안아주고 싶어요.
그런데 다림 아이들 중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두려워서요.
이것이 가짜일까 봐, 자신의 경험처럼, 조금 도와주다 말까 봐
혹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스스로를 위해서 돕는 것일까 봐..
지금껏 나를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 자기 단체, 자기 의를 위해 다가오는 많은 사람들을 경험했기에 더욱 마음을 못 여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 아이들을 우리가 설득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기까지 말이죠.
어쩌면 하나님이 그러고 계신지도 몰라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표현이 왜 위대한 말인 줄 아십니까?
이 말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말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죠.
우리의 요구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니까요.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우리입니다.
바로 내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거예요.
오늘은 이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일지라도… 어떤 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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