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2. 06:50ㆍ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민수기 25:10-18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가 죽기도, 살기도 합니다.
어제와 오늘의 내용은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브올에서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릅니다.
이는 우상숭배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습니다.
전염병이 돌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지는 않았을텐데요.
그런데 죽임을 당하는 것은 수 만 명에 이릅니다.
우상숭배는 혼자 죽지 않습니다.
영적인 문제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 위험하죠.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보면,
우상숭배는 전염병처럼 위험한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흔히 우상숭배를 우리는 무슨 이단에 빠지는 것처럼 생각하죠.
그러나 우상숭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너무 과한 표현인가요?
그러나 빛을 잃으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둠이 오잖습니까?
내가 어둠을 부른 것은 아니지만 빛이 없으면 그냥 어둠이 오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잃으면,
그것이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적극적이지 않았어도,
우상숭배입니다.
나쁜 이야기는 착한 이야기보다 재미있습니다.
남을 욕하는 것은 남을 칭찬하는 것보다 쉽고요.
옳은 길보다는 빠르고 쉬운 길에 우리는 익숙합니다.
왜냐하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죠.
이제부터는 어려운 본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액면 그대로라면 비극적이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전염병이 돌고 어수선한 와중에
시므리는 이방여인 고스비를 벌건 대낮에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지금 이방여인들과의 음행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 앞에 놓였는데
시므리의 행동은 정신나간 행동처럼 보입니다.
이를 두고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는
창을 들고 그들을 따라 들어가 음행의 현장에서 그들을 찔러 죽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죽이고, 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야 하는 성경의 본문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길 또한 우리가 완전히 알 수가 없죠.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에도
사랑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의 태도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의문투성이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오늘 본문을 해석할 자신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그 해석과 깨달음의 영역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지금껏 모든 이들이 읽는 방법으로는
읽히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평이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그렇게 음행을 저지른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있었고,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음행하는 시므리에 대해 본보기의 징계가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징계를 대신 한 비느하스는 영원한 제사장의 직을 부여받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별로 다를 것이 없죠.
그런데 이 본문은 이렇게 해석하기에 의아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심오하고,
마치 기독론적인 해석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지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해석의 결말을 갖지 않는 저의 의구심을 몇 가지 적고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시므리가 데리고 간 고스비는 미디안여인이라는 겁니다.
이전의 브올에서 음행을 저지른 이들은 모압여인들이죠.
이들은 바알신전을 돕는 여사제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스비는 바알브올의 여인들과 다른 이죠.
이는 시므리의 행동은 우상숭배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고스비는 이방여인입니다.
그렇다고 이방여인이라고 그것이 이 사건의 큰 문제가 될까요?
아시다시피 모세의 아내도 미디안여인입니다.
또 한 가지는 단순히 음행을 저지른 여인인데요.
그런데 성경은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름을 적는다는 것이 성경에서는 특별한 일임을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이름이 없었고요.
또한 이름이 적힌 여인들은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죠.
시므리의 상태에 대한 어떤 표현도 없습니다.
그가 술을 마시고 음행을 했다거나,
우상숭배에 취해 그런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느닷없이 나타나 그런 일을 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이 일을 두고 ‘속죄’라는 표현도 쓰시죠.
속죄라는 표현은 누군가를 대신해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시므리라는 이름의 뜻이 ‘어린양’이라는 거예요.
물론 고스비의 뜻은 ‘거짓’ ‘사기’라는 뜻이고요.
뭔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드리고요.
분명한 것은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퍼지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 인해 구원이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나의 우상숭배는 나뿐만 아니라 남까지 죽이고요.
주님을 섬기는 나를 통해 하나님은 세계를 살리기도 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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