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2. 06:50ㆍ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민수기 25:1-9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잘 알려진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탄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주제는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을 실족시킬 수 있을까?”였습니다.
한 젊은 사탄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들을 전부 죽이면 됩니다.”
이에 대해 사탄의 대표격인 대장은 이렇게 말하죠.
“옛날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지만 한 사람을 죽이면 순교의 피가 씨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수천수만으로 늘어났었기 때문에 그건 효과가 없어.”
이번에는 다른 젊은 사탄이 말합니다.
“그러면 죽이지 말고 감옥에 다 가두면 전도하러 돌아다니지 못할 것 아닙니까?”
이번에도 사탄의 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들은 가두면 가둘수록 더욱 기도와 찬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소용없다네.”
그때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늙은 사탄이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자유를 줍시다. 예수를 잘 믿게 하고, 기도도 자유롭게 하게 합시다. 성경이나 전도도, 서로 사랑하는 일도 아무런 제약을 받기 않도록 합시다. 어떤 불편도 가지지 않도록 해 주자고요. 그러면 아마도 너무 편해서, 너무 자유로워서, 너무 괜찮아서 딴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보다는 비본질적인 것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생각이 더 중요해지고, 예배보다는 편한 삶이 더 좋고, 하나님의 가치보다는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제 묵상에서 언급한 사건이 나옵니다.
‘브올의 사건’이라고 명명된 사건이죠.
싯딤에 당도한 이스라엘은 바알의 제단에 절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싯딤은 여리고성 동쪽에 있는 땅으로,
어느 면으로 보면 광야생활의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해요.
성경은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음행은 단순한 성적인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의 신전에는 보통 여사제들이 제사를 도왔는데요.
그들은 제사장이나 혹은 신령한 은사가 있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몸을 파는 이들이었어요.
그것이 바알신전의 관습이었습니다.
왜 이런 관습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은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다만 지금 이스라엘이 바알신전에 있는 여사제들과 음행했다는 것은
단순한 성적인 유혹을 넘어 바알신에 대해 궁금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알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야다]는 ‘동침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건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 뒤에 나온다는 점이에요.
물론 브올의 사건 뒤에는 발락과 발람의 손길이 숨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계시록2:14에 기록하고 있기도 하죠.
이는 단순한 전개가 아닙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힘으로 치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보다는 그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겁이 났죠.
그래서 발람을 시켜서 그들을 저주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나오는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이런 전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생각할 것을 제공하죠.
우리를 결국 넘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라고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외부의 공격으로 쓰러졌던 적이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패배를 당한 적이 없고, 또한 수많은 사람을 잃은 적도 없어요.
그들이 쓰러진 것은, 그들 가운데 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 때문입니다.
불평이 그랬고, 믿음이 그랬으며, 신앙이 그랬습니다.
편안할 때 가장 위험합니다.
안전하고 나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가 가장 위험해요.
이제 이스라엘은 광야의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그들에게 자유의 땅이 눈앞에 있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광야를 지나 이제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제 그들을 말릴 사람들은 없습니다.
가나안의 진입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죠.
그래서였을까요?
가나안의 신, 바알이 궁금해진 것은 말이죠.
너무 일찍 김치국을 마신 것일까요?
바알이 풍요의 신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을까요?
가나안에 들어가서 풍요롭게 살려면 바알을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을까요?
우리들은 많은 자유를 누립니다.
예배하는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도
다 나의 자유에 달렸죠.
그래서인가요?
우리는 편안해지고 자유해지면 딴 생각을 합니다.
죄송한 이야기지만, 수많은 고민을 하죠.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 많은 걱정거리, 우울한 일들, 미워하고 다퉈야 하는 일,
이래저래 마음 상하고, 감정 상하는 일,
물론 이런 것들이 오늘날 중요하고 마음에 담아야 할 일들이죠.
그런데...
혹시 그런 마음과 생각들이 혹시 우리가 너무 편해서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정말 애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북녘땅의 동포들 말이죠.
그들에게는 주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열망을 정치가 막고, 권력이 막고, 권세가 막죠.
그들에게는 방해가 너무 많고, 태클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방해들 때문에 자신의 소망을 갖지 못한 미움이 많을텐데...
원망도 많을텐데...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그들에게서 어떤 원망이나 미움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에요.
그들은 원망한 여유도 없었어요.
그들은 미워할 틈도, 감정이 상할 틈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오로지 자신이 알고 싶은 주님에 대한 열망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위험을 무릎쓰고 신앙생활을 하죠.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자유 때문에 더 괴로운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편한 생활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죠.
정당한 고민과 염려를 지닌 분들에게 획일적인 사고를 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민과 딴 생각이 너무 많은 자유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결국 외부의 공격에 의해 우리는 넘어지지 않아요.
내 안의 넘치는 고민 때문에, 필요이상의 염려 때문에 넘어집니다.
'묵상하는말씀 > 민수기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가치관이 변해서 어떤 땅이어도 젓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 수 있는 거듭남이 가나안입니다 (0) | 2018.11.20 |
---|---|
하나님의 공평에 의지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0) | 2018.11.20 |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금보다 미래에 더 드러납니다 (0) | 2018.11.20 |
믿음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질 그날을 아는 것입니다 (0) | 2018.11.12 |
한 사람으로 인해 모두가 죽기도, 살기도 합니다 (0) | 2018.11.12 |
만날만한 때에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0) | 2018.11.12 |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세상을 보는 나는 하나님의 영을 가졌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0) | 2018.11.12 |
하나님을 바꾸려 들지 말고, 나를 바꾸세요 (0) | 2018.11.06 |
예배는 우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려 하는 것입니다 (0) | 2018.11.06 |
애꿎은 나귀를 때리지 마세요. 이중적인 나의 마음을 때리세요 (0) | 2018.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