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세상을 보는 나는 하나님의 영을 가졌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2018. 11. 12. 06:48묵상하는말씀/민수기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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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3:25-24:9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세상을 보는 나는 하나님의 영을 가졌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세요

동일한 상황이 반복됩니다.
발락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계속 요구하고,
발람은 이미 받은 응답을 애써 외면하면서 또 제단을 쌓습니다.
이에 하나님도 똑같은 대답을 반복하시죠.
마치 누가누가 끈질긴가를 보여주는 싸움같아 보입니다.

이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에서 저는 발람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발락이나 발람의 태도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딱, 특별히 발람이 딱 나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죠.
주님을 알지만, 그리고 그의 음성이 무엇인지도 알지만,
자신의 욕망,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응답을 끝까지 들으려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는 드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발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메시지에서 주어지는 묵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부터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요.
하나님이 발람에게 들려주시는 이스라엘에 대한 생각은 애절합니다.
구구절절하게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죠.
문제는, 지금껏 민수기를 관통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이렇게 애틋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계속적인 불평과 불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이스라엘이었고요.
그런 이스라엘을 보시며 진노의 마음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마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정상적인 아버지의 모습말입니다.
요즘은 간혹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이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처와 비정상적인 아버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이전에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자주 사용했었는데요.
이것이 힘들어진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왜곡된 아버지 상으로 인해 하나님을 아버지에 비유하는 것에 극심한 반감을 갖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정상적인 아버지라는 토를 다는 것이니 이해를 바랍니다.

마치 버릇없고 늘 속썩이는 아들에게 늘 잔소리와 훈계를 일삼는 아버지,
때론 포기할 듯 속상함을 드러내며 안타까움에 문을 닫아버리던 아버지,
그러나 밖에 나가면 늘 아들 자랑에, 아들을 감싸안고,
혹시나 밖에서 아들이 상하지는 않을까? 해꼬지는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
그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불같은 진노를 드러내신 것도,
때론 경고의 메시지와 추상같은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신 것도,
모두다 사랑의 메시지였음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여러분은 어떤 느낌으로 읽으셨을까요?

다시 돌아와 오늘도 여전히 발람의 태도에 대한 묵상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발람에게서 예전과 다른 하나의 태도를 발견합니다.
바로 으레 했던 것처럼 마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술을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마도 그가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뜻일 것입니다.
가령, 빙의와 같은 무당들이 쓰는 접신의 방법을 사용했다던가,
주술적인 심령술같은 것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못된 뜻, 자신의 욕망과 계산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죠.
그런데 그런 마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랬더니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여기서 2가지 정도의 팩트체크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나의 방법을 내려 놓으니 하나님의 방법이 보이더라는 거죠.
가득찼던 나의 욕심을 내려 놓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간절함에서 출발합니다.
성령은 구하고 찾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이죠.
그러나 그것이 나의 욕심이나 나의 뜻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대한 간절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간절함이 아니고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간절함이어야 한다는 거죠.
나의 뜻으로 가득차면, 성령의 운행하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의 욕망으로 채워져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왜곡되서 읽힙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세상이 달라져 보인다는 점이죠.
발람에게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에게 주어질 돈으로 보였죠.
나의 욕망을 채워줄 기회나 도구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하고 죽일 마음이 쉽게 생기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한 시선으로 보니 모든 생명이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겁니다.

나의 욕심을 버려야 말씀이 들립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욕망을 버려야 하나님의 마음이 보여요.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세상을 보는 나의 영은 옳은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악하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사람을 정확하기 볼 줄 아는 영을 지녔는지를 돌아보아야 해요.
나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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