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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성경본문올바로읽기 5]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빌립보서4: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 주님이 능력을 주시면 나는 무엇을 할까?

가끔 저는 이런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삼손과 같은 힘을 주시면 나는 어디에다 쓸까?”

하나님께서 내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시면 나는 어디에다 쓸까?”

하나님께서 내게 아브라함처럼 부를 주시면 나는 어떻게 쓸까?”

좀 우스운 상상이죠?

그런데 실제로 저는 이런 상상을 곧잘 합니다.

삼손과 같은 힘이 있다면 제가 어디에다 썼을까요?

올바른 곳, 써야 할 곳에 썼을까?

혹시 지혜를 사기 치는데 쓰지는 않았을까?

보통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 저에게 부를 허락하시면, 많은 사람을 살리고, 돕고, 나누며 살겠습니다.’

저도 그런 기도하거든요?

이 지역을 세우고,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없도록 만들고 싶다고 기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기도를 한 이후에 제 속마음에서 몰려오는 것들이 뭔지 아세요?

평생 갖지 못했던 작은 집 하나는 괜찮겠지...

그동안 고생했는데 월급이라도 조금 받는 것은 괜찮겠지...

정말 괜찮을지도 모르죠.

문제는 그런 소소한 욕심이 점점 자란다는 것입니다.

아직 부를 허락하시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힘, 지혜, 부를 주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그 이유를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혹 나의 기도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해서 그럴까요?

이런 생각에 불만도 쌓이고, 아쉬움도 커집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나에게는 삼손과 같이 힘을 쓸 상황을 만들어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삶의 공간에는 솔로몬처럼 지혜가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 필요하지도 않고,

아브라함처럼 민족의 지도자로 나를 세우지 않으셨다는 사실이죠.

저는 그 생각에 다다르자 너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손이 어떤 인물입니까?

블레셋의 압박과 탄압이 있었던 시대, 그들을 대적하는 장수로 세운 인물 아닙니까?

이는 마치 역사책에서 읽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던 김좌진 장군 같은 삶이었겠지요?

그 삶이 쉬었겠습니까?

아무리 힘을 주신들 사실 그 삶을 살아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힘이 없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마치자 감사하기도 했어요.

 

지혜를 잘못사용해서 넘어진 솔로몬까지 가지 않더라도, 초창기 솔로몬의 삶은 어땠을까요?

많은 재판을 담당하고, 누군가의 억울함을 도와주어야 하고, 가장 알맞은 계획들을 세워야 하죠.

저는 음식점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입니다.

소위 결정 장애라고 하죠.

먹는 음식 앞에서도 결정 장애가 있는데, 누군가의 삶을 담보로 어떤 명쾌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돈은 또 어떨까요?

저는 돈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잘 알지 못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모든 문제는 돈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의가 나고, 돈 때문에 부정이 저질러지죠.

돈 때문에 늘 고민하고, 돈 때문에 경계와 의심과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하죠.

아마도 저는 그런 삶이었다면 심장마비가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돈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 더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 이유죠.

 

2. 어떤 능력일까?

우리는 참 능력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능력을 사용할 재능이 있는지, 힘은 있는지 생각은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게 주신 사명 가운데 그 능력이 필요한지 고민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라는 것이 그저 좋은 것으로 치환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능력을 이익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봅니다.

이런 예와도 같은 것이죠.

엄마가 아이들에게 너희들에게 좋은 것을 먹여줄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대부분 맛있는 것을 기대하죠.

그러나 엄마가 아이들에게 주는 것이 보약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쓰고 맛없는 보약말입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손사래를 치며 도망갈 것입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그들에게 좋은 것이란 맛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요.

능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능력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더라고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것이 진짜 능력이죠.

그것은 나의 삶의 자리를 제로베이스라고 하면 그 위에 쌓이는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떨어진 문제를 다시 제로베이스로 만드는 힘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의 힘인 셈입니다.

 

3. 어떤 처지에도 기뻐할 수 있는 능력

오늘 성경본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다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이유가 어쩌면 오해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계속 성경에 대한 해석의 오류를 지금 잡아가고 있는데요.

우리가 잘못 해석하거나 뜻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본문도 마찬가지인데요.

이 본문을 향한 우리의 해석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다 그런 해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구절을 온전히 살펴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그 첫 단추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능력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됩니다.

 

이 구절은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빌립보교회에 대해 잠깐 알아봐야 하겠죠.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드로아라는 곳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드로아는 현 터어키의 서쪽에 있는 알렉산더 트로아스라는 지역인데요.

사실 바울은 그곳에서 터어키의 북부지역으로 가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환상에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를 듣고 마케도니아로 넘어가죠.

그 당시에는 마케도니아지방이지만 지금은 그리스입니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그리스도를 영접한 인물은 루디아라는 여인이었죠.

빌립보에서 교회가 생긴 것은 반전의 기적 때문입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 앞에 귀신 들린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귀신들린 여인은 그 능력으로 사람들의 점을 쳐주어 돈을 벌었는데요.

바울이 그 여인에게서 귀신을 내쫒아 주었습니다.

영적인 힘이라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합니다.

사탄도 영적인 힘이 있어요.

병을 고치고, 길을 알려주고, 돈을 벌게 하고, 기적도 일으킵니다.

영적인 능력에만 혈안이 되면 우리는 그 속에 역사하는 힘을 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도 귀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점을 쳐 주었거든요.

여기서도 영적인 능력으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냅니다.

 

암튼 그로인해 그 여인을 통해 돈을 벌던 이들에게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유명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죠.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가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이 두려워 자살을 기도하는데요.

바울과 실라가 도망하지 않고 이를 막아줌으로 그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친구가 되죠.

그리고 그 또한 예수를 영접하고 그의 집에서 모임을 시작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하죠.

 

저는 이 구절에서 놀라운 바울의 능력을 발견하는데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었고, 그것으로 감옥에 갔다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잘못은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이들이 아니라 그 귀신들린 여인으로 돈벌이 하는 이들 아닙니까?

그런 이들이 감옥에 가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거기서 무슨 기도하시겠어요?

바라던 대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기적이 일어났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도망가야죠.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바울과 실라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추측할 수 있죠.

그들의 기도가 이곳 감옥을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만약 탈옥이 목적한 기도였다면 냉큼 나갔겠죠?

그렇다면 무슨 기도였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들은 탈옥이 목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죠.

그런데 그런 평정심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적어도 그들은 지금 감옥에 들어간 사실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처지에 놓이든 그들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기 진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처지에 놓이든, 어떤 결과에 놓이든 기뻐할 수 있는 능력....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 1등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항상 1등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1등에서 밀려나 2등을 했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를 한다면 어떨까요?

공부해서 1등 되는 것 정말 능력입니다.

그러나 1등이어도 교만하지 않고, 꼴찌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 또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자녀에게 어떤 능력을 주고 싶으십니까?

 

4. 자족하는 법을 아는 능력

이렇게 빌립보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는 소위 유럽지역의 첫 교회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일행에게는 큰 힘이 되는 선교지원의 모교회가 되었죠.

첫 교인이었던 루디아는 여성사업가였죠.

빌립보교회는 그렇게 든든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빌립보교회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바울이 편지를 썼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여서 죄송하지만 넋두리로 그냥 들어주세요.

저는 모든 교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매일 저는 교인 명단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첫 일과죠.

그런데 제가 연락하는 분들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연락을 한다면 그것은 제 안에 그분에 대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거나, 어떤 마음의 문제가 있는 경우이죠.

물론 다 똑같을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렇습니다.

가급적이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해결하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인계점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질 경우 저에게 개입하려는 갈망이 시작되죠.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느낀 문제점은 그들에게 염려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빌립보교회의 상황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빌립보서에서 기뻐하라는 명령이 유난히 많다는 것은 빌립보교회가 기쁨을 잃었다는 증거죠.

왜 빌립보교회는 기쁨을 잃었을까요?

빌립보교회는 여러 가지로 든든한 교회인데 말이죠.

재정도 든든하고, 사회적인 지위 또한 괜찮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쁨을 잃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론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와 대비시켜보면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질문을 드려보죠.

가난한 사람이 염려가 더 많을까요? 부유한 사람이 염려가 더 많을까요?

쉽지 않은 질문인가요?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떠신가요?

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염려가 더 많을까요?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염려가 더 많을까요?

염려, 걱정은 자신이 할 수 있을 때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염려나 걱정이 아니라 기적을 바라기 때문이죠.

돈이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재정적인 어려움을 더 많이 느낍니다.

요즘 삶이 어려워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있는 사람들이죠.

없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느끼기도 쉽지 않아요.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에 훨씬 걱정도 많았습니다.

이거 다 날리면 어떻게 하지?’

내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이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사도바울은 이런 빌립보교회에 영적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빌립보서4:10~12,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가 가르쳐준 영적 능력은 바로 자족하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능력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가난해도, 부유해도, 높아져도, 낮아져도, 어느 상황에서도 자족할 줄 아는 능력 말이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이런 광고 카피처럼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바로 안식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세상의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도 나를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뜨리지 못하기 때문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큰 능력은 힘도, 지혜도, 부도 아닙니다.

정말 가장 큰 능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죠.

모든 것, 즉 잘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잘 안 되는 것까지 할 수 있기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족하는 법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능력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능력이 여러분 안에 있을 때 여러분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참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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