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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성경본문올바로읽기]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허락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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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13,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1. 바울이 말한 시련과 우리가 생각하는 시련 

성경은 어렵다면 어려운 책이고 쉽다면 쉬운 책입니다. 물론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성경의 배경과 시대상황, 문화 등을 파악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전 이해들이 필요하죠. 그런 의미로 보면 성경은 쉽지 않은 책입니다. 고고학적 지식이 필요하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경은 학술적인 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책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영적인 책이죠. 그래서 제 아무리 지식이 충만해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이고요. 제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하여도 온전한 해석이 불가능한 책이죠.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읽기에 수반되는 것이 기도와 간절한 믿음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기도를 먼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도록, 주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 그분의 심정을 알기 원할 때, 그분의 마음으로 몰입되는 경험도 하게 되고요. 그분의 애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분의 눈물을 성경에서 발견하는 은혜를 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읽는 내내 주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뭔지를 생각합니다. 왜 이 말씀을 오늘 내게 하시는지를 묵상할 때 삶에 적용하는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런 특수성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는데요. 그런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 정말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후맥락을 읽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우리는 성경에서 한 문장에 꽂힐 때가 많지요. 그러나 우리가 잘 알아야할 것은 우리에게 꽂힌 그 문장이 문맥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앞뒤의 문장을 떠나 읽을 경우, 우리는 심각한 왜곡 앞에서 설 때를 경험하죠. 오늘 본문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련”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시련은 견딜 수 있는 시련 밖에 주시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시죠.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유는, 어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이 그리 강하지 않으니 염려 말라고 읽히기 때문이죠. 우리는 고난이나 시련을 당하기 원치 않습니다. 혹시 고난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강력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고난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가 고난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그러니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그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시련과 여러분이 생각하는 시련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요? 그 답을 찾으려면 바로 앞 구절인 12절 한 구절만 읽으면 됩니다. 고린도전서10: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오늘의 본문과 이 12절 말씀과 어떤 연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생각하는 시련과 이 구절과의 관계에는 어떤 연관이 있나요?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바울이 생각한 시련은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2. 상황은 달라도 기본적인 유혹은 다르지 않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독보적이고 유명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라는 곳이 정말 대단한 곳이었거든요. 먼저 그곳은 많은 지식과 철학이 발달했고, 영적인 우상들이 즐비했던 곳입니다. 궤변과 사변들의 집합소처럼 여겨졌던 곳이고, 영적인 우월성이 있었던 곳이죠. 그러다보니 사회는 타락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창가가 범람하고, 먹고 마시는 일들이 많고, 방탕과 부도덕에 몸을 맡기는 일이 많았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유혹이 많았습니다. 그런 고린도에서 교회가 생겼어요. 주님의 복음이 들어가고, 주님의 말씀이 들어가면서 그들이 깨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 유혹들을 뒤로 하고 그야말로 고린도라는 사회와는 정반대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 셈이죠. 그러니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합니까? 이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칭찬과 박수도 아끼지 않았죠. 그러나 바울이 이랬던 교회에 편지를 보내야만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잘하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차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 문제란, 이들이 이제 조금씩 자신감이 붙어서 웬만한 유혹에도 괜찮다고 느낀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허용되는 것도 많아지고, 가볍게 여기는 것도 생기게 된 것이죠.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등장한 말씀이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이 본문의 말씀이죠. 그러니까 본문에서 언급한 시련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고난이 아니라 유혹과 관련된 말씀이죠. 바울은 유혹은 상황이 달라져도 유혹은 유혹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시련을 유혹과 관련되어 풀면 이렇습니다. 이 말씀은 유혹이 적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유혹은 늘 있고, 유혹은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유혹이 강해서 사람이 죄를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어떤 유혹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혹을 이길 힘을 주신다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련과 전혀 다른 의미를 말합니다. 우리가 시련으로 생각한다면 외부의 고난의 크기로 해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적은 고난, 감당할만한 공격, 약한 시련 등에 집중하죠. 그러나 유혹이라는 의미라면 이야기는 다르죠.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해답은 유혹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경우의 예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운동선수가 경기를 합니다. 오늘 호주오픈 테니스 경기를 했는데요. 이런 경기는 나보다 잘하는 선수와 맞붙으면 질 가능성이 훨씬 많죠. 경기를 이기려면 나보다 못하는 선수여야 합니다. 핵심은 상대에게 있는 것이죠. 그러나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더 자고 싶고, 더 눕고 싶고, 게으름을 피고 싶은 유혹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을 이기는 핵심은 나에게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구절의 의미는 외부의 도움이 아닌 내면의 힘이 주 목적입니다.

 

3. 고난의 이유

여기서 한 가지 더 논의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우리가 고난을 받느냐 하는 점이죠. 그리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고난이 없는 삶, 걱정과 근심이 없는 인생,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늘 고난과 벗 삼아 살아가죠.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1:8,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살 희망조차도 잃을 만큼 힘에 겹게 짓눌리는 환난을 당했다고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를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고린도후서1:9,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강은 물을 만들 힘이 없습니다. 단지 상수원의 샘물을 받아 강을 만들 뿐이죠. 그러나 강은 온 사방 평야에 물줄기를 뻗습니다. 때론 마르기도 하고, 때론 넘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강은 스스로 만들거나 스스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상수원의 물을 나르는 일만을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그 공격은 더 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하나님 편에 서면 설수록 그 강도는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것은 그 싸움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이 설명을 할 때마다 저는 수영을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물에 들어가면 떠보려고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러나 몸이 뜨기는커녕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몸은 더 가라앉습니다. 그때, 코치가 저에게 한 말은 한마디였습니다. “물에 몸을 맡기세요.” 말이 좋아 맡기는 것이지 그게 어디 쉽습니까? 물에 몸을 맡기면 금방 죽을 것 같은데 그게 되냐고요? 그런데 정말 절망적으로 죽었다 하고 몸에 힘을 빼면 물에 몸이 뜹니다. 물론 고개를 다시 쳐드는 순간, 다시 몸은 물에 가라앉죠. 그것을 보면서 저는 맡기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어요. 나를 포기하는 것이 이것이고, 나의 의가 이런 것이구나 싶더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수영은 앞으로 가야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움직여야 하고, 그 움직임으로 전진하죠. 그러나 그 움직임은 내 몸이 뜬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물에 몸을 맡긴 이후에야 나의 움직임도 소용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나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40년간 광야의 생활을 해야 했어요. 광야의 생활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는 생활이었습니다. 그것이 먼저 있고 난 후 가나안에서는 스스로 일을 하고, 스스로 걸었습니다. 우리가 사역이라는 것을 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그분에게 나의 목숨을 드렸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사역, 나의 힘도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힘을 쓰죠. 내가 무엇을 해보려고 하고, 나의 힘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치고 힘겹고, 어려운 것이 되는 것이죠. 사랑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하죠. 충분한 영적 안식을 아는 사람만이 안식을 줄 수 있습니다. 잘 받을 줄 아는 사람이 잘 줄 수도 있습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이들만이 남을 도울 수 있고요. 지치지 않고 말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런 말씀을 드리죠.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나를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채우신다고 말이죠. 주님의 이름으로 남을 도우면 주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말입니다. 강이 물을 바다에 주면 샘물이 강을 채우듯이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싶다면 많이 사용하면 됩니다. 많은 물을 공급받고 싶다면 많이 나누어 주면 됩니다. 그 강물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죠. 적은 고난에 관심하기 이전에 고난을 이길 그분의 도우심에 관심해야 하죠. 죄송합니다만 저의 이야기로 이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저는 생각보다 많은 인생의 고비들을 겪었습니다. 물론 고난의 경중을 따지면 어디 내놓을만한 그런 큰 고난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몇 번의 목숨이 경각에 닿는 일도 겪었고, 여러 번 교회에서 쫓겨난 경험도 있습니다. 여전히 매일 밤 재정적인 문제에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요. 많은 가족들의 끊임없는 문제는 저의 부족함을 계속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이 나에게 없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 보는데요.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을 보는 눈도 달라졌을 것이고, 사람을 보는 눈도 달랐겠죠? 교만을 벗기 힘들었을 것이고(물론 지금도 교만합니다만) 조금의 어려움에도 쉽게 포기했겠죠. 고난은 힘겹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고난을 유익으로 만드는 능력을 키우세요. 위험이 기회라는 말처럼 고난이 우리에게 주님의 역사를 부르는 기회입니다. 외부의 힘에 나를 맡기지 마시고 내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의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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