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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성경본문올바로읽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태복음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1. 사람을 각각 다르게 만드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각자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어떤 이는 감성이 충만한 반면에, 어떤 이는 두뇌가 비상하기도 하죠.

무엇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한 것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적으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같은 시간 공부를 해도 더 뛰어난 이도 있죠. 

그런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하나님은 창조에 있어서 차별적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이런 차별적 창조에 대해 기계적 중립을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하나님의 차별이 맞기 때문이죠.

하나님은 다르게 만드셨고, 어떤 면에서는 차별의 요소로 느낄 만 하다는데 이견이 없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 똑같이 만드셨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차별 없음이 꼭 창조의 때에 발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저는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하나님은 각각 우리를 다르게 만드셨고, 그 의미는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이, 어떤 이에게는 더 깊이 심으신 것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자고요.

자꾸 이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을 기계적 중립자로 보게 되죠.


2. 하나님의 공평은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문제는 하나님의 공평(차별의 반대적 의미로)은 다른데서 이루어집니다.

제가 자녀와 제자라는 분리된 개념으로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설명해 드렸는데요.

다시 이 사안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자녀의 위치보다 제자의 위치가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깊은 일을 하게 되죠.

그러나 그 일은 재능이 없이는, 주어진 사명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제자처럼 일을 하는 것도 주님이 주신 마음(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죠.

좀 더 면밀히 말하면 그런 마음(재능)이 없으면 제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못해요.

어떤 이는 제자가 되고 싶은데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든 것 자체가 그가 이미 제자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어떤 이는 그런 마음조차 없습니다.

더러운 것을 보고도 청소할 마음조차 없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더러운 것만 보이는 사람이 있죠.

저는 그들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이미 여러 차례 말했죠.

아시다시피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공평하지 않다고 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그들에게 가르쳐봐야 잘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청소에 관한한 더러운 것이 보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재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물짓고,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도 재능인데요.

이게 고통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재능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아요.

분명 주님이 주신 재능인데 말이죠.

예술적 재능이 좋은 것 같죠?

그들은 그 나름대로 고통이에요.

예술적인 사역을 해야 하고, 그것을 창조해 내는 작업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고난을 받죠.

돈을 버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재능 받으면 좋으실 것 같죠?

그런데 이 재능 또한 고통이죠.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고, 계산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리스크도 언제나 감당해야 하죠.

그러니까 재능에는 책임이 따르고, 주신 은혜에는 더 많은 사역이 따르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져요.


3. 하나님은 무엇을 싫어하실까?(하나님에게는 무엇이 죄일까?).

그런데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하나님은 정말 어떤 것을 싫어하실까요?

가령, 목사에게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일까요?

물론 목사라는 직책이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러나 저는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목사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죠.

사역과 역할 면에서는 모든 가족들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 땅에서 예수로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필요한 이유를 저는 가치관에 대한 선포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사리분별이 힘들고, 가치관의 혼돈이 심한 이 땅에서 하나님의 깃발을 드는 것이 목사의 임무라고 생각하죠.

그런 면에서 목사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일까요?

기도하지 않는 것, 사랑하지 않는 것, 긍휼이 없는 것,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것이죠.

목사에게 가장 큰 잘못은 말씀을 읽지 않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씀을 왜곡하거나(그것이 무지든, 일부로든) 오해하는 것이죠.

사실 책은 문자를 알면 다 읽잖아요.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고전도 초등학생에게 읽으라고 하면 읽습니다.

그러나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이해한다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꿰뚫는 것이죠.

성경의 맥락을 꿰뚫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세계관, 하나님의 가치관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잘 모르고 설교를 하거나, 목사의 일을 한다면 그것이 큰일이죠.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질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줄줄 외워요.

그런데 그렇게 줄줄 외워도,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모르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번 주에 한전도사님이 00교회에 부임했어요.

부임을 위해 면접을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면접시험을 보겠다고 성경시험을 보더라는 거예요.

요절 쓰는 것과, 성경순서 등등의 시험지를 진짜 가지고 오더래요. 

이 시험을 보는 이유가 00교회 직분자들의 시험이라서 전도사들도 보는 거라더래요.

대단하죠?

우리교회에서는 이런 시험 없어서 좋죠?

그런데 이런 시험쯤 있어야 좀 폼 나고 멋져보이지는 않으세요?

그거 공부하면 되거든요?

문제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해서 성경을 보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만약 그 성경시험이 진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아는 시험이었다면 강남은 변했겠죠.

아마 땅값부터 내려갔을 겁니다.


4. 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며칠 전, 빵집 주인의 뉴스 기사를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빵에 꽂혀서 제빵 기능사가 되어서 일을 했는데요.

그분이 유명한 것은 빵에 우유, 버터, 설탕 등을 넣지 않고 천연효소로 빵을 만들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그가 그런 건강한 빵을 처음부터 만들지는 않았데요.

그분의 딸이 백혈병 진단을 받고 병원신세를 졌는데 그곳에 보니 많은 환자들이 먹는 것들을 조심하는 것이 보이더래요.

자신이 빵을 만드는 사람인데, 이분들에게 안심하고 먹을 빵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싶었데요.

그래서 연구를 해서 만든 것이 지금의 천연발효빵이라는 겁니다.

결국 딸 아이가 그분을 바꾼 것이죠.

저는 이 기사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빵 만드는 기술도 재능이거든요.

그런데 그 재능으로 돈을 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하나님이 그 재능을 주신 이유는 그 재능으로 많은 이들을 유익하게 하라는 뜻이죠.

똑똑한 사람들 많습니다.

저는 책을 한 두 세 번 읽어야 책이 머리에 들어오는데요.

어떤 이들은 한번만 읽어도 그 책의 의미를 좔좔 꿰는 분들이 계시죠.

천재 같은 머리를 가졌죠.

그런데 그분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런 좋은 머리, 천재적 머리를 주신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은 머리, 똑똑한 지식 가졌다고 자랑하며 다니라는 것은 분명 아니시겠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머리로 보다 세밀하고,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내밀한 하나님의 가치관을 캐내어서 말하고 전하라는 뜻 아닐까요?


정세이야기를 잠깐 할까요?

북한의 김정은이 신년사를 했는데 이게 화제죠.

저도 나름 북한선교에 관련되어있던 사람이라 관심이 많은데요.

그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을 언급하면서 참가 용의가 있다는 말을 했죠.

이것은 이례적인 언급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대화 물꼬가 열리는 대단한 기회가 생긴 셈이죠.

그런데 다음날 뉴스의 기사를 보고 저는 화들짝 놀랐어요.

언론의 헤드라인이 대부분, ‘이것은 화전양면작전이다.’라고 썼더라고요.

그러니까 화해 제스처를 쓰면서 뒤로는 전쟁을 준비한다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요?

그래서 그 대화 거절해야 합니까?

그래서 속지말자고요?

늘 부모에게 대들고 사고만 치던 아들이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를 않아요.

사고만 치고, 연락이 오는 것이라고는 경찰서고... 그런 아들이 연락이 왔어요.

지금까지 사고만 치고, 거짓말만 했으니까 그 연락 무시해야 하나요?

이런 하나마나한 논평을 신문기사라고 내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적어도 지식인이면, 적어도 지도자면, 그런 감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조금 더 세밀하게 정세를 분석하고 이런 기회를 잘 살려서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생각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말 작은 불씨를 가지고도 귀하게 살려서 평화의 불길을 타올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하나마나한 이야기,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감정적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그의 머리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5.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

주님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책임인데요.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지 우리 병을 고쳐주신데,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신데... 이런 것은 아니잖아요.

그분이 이런 기적을 행하셨데... 이런 능력자시래... 이런 것도 아니잖아요.

정말 우리가 증언해야 할 것은 그분의 가치관과 그분이 뜻하신 나라 아닙니까?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읽어야 하죠.

그냥 오랫동안 교회에서 들어왔던 말씀으로가 아니라 내가 읽어야죠.

성경구절 외우지 않아도 됩니다.

언제나 찾아볼 성경책이 늘 곁에 있잖아요.

성경공부 이런 것 안 해도 됩니다.

정말 기도해야 할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에요.

2018년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여러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영성예배에서는 몇 달간 성경에서 잘못 해석되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나누려고 합니다.

함께 떠나보시죠.


6.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

오늘 본문은 모두 아시는 말씀입니다.

2~3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 이 말의 의미는 뭘까요?

여러분은 이 말씀을 지금껏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셨습니까?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한 것은 예배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 그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도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말이죠.

또, 기도에 대해 말할 때도 쓰입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물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무소부재하시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본문이 예배나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아닌 다른 의미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본문을 조금 더 유심히 관찰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본문입니다.

먼저, 이 본문 마태복음 18:20절은 단독적으로 떨어져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새번역을 사용하신다면 성경의 본문에는 비교적 상세한 부제들이 달려있는데요.

이 본문의 부제로 어떤 말이 달려있는지 아세요?

제 성경을 보면, 용서하라는 부제가 달려있고, 그 본문은 마태복음18:15~20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본문은 용서와 관련된 본문일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죠.


조금 더 신중히 살펴보면 마태복음18장은 여러 말씀이 복합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맨 먼저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뒤 이어서 작은 사람을 실족케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라는 말씀이 이어지고요.

이어서 읽은 양의 비유가 나오죠.

그리고 형제의 죄에 대해 권면하고, 충고하고, 용서하라는 오늘의 본문이 나오고,

그 뒤로는 유명한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7. 용서하는 자에게 함께 하겠다.

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 15~20절까지를 한 구절 한 구절 다 읽어보겠습니다.

15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에게 충고하여라. 그가 너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새번역은 [너에게]라는 구절을 가로 안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번역본들이 그 구절을 빼먹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 구절로 어떤 이가 지은 죄는 일반적인 죄가 아니라 나와 관련된 죄가 됩니다.

너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가서 이야기를 하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에게 충고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잘못을 지적하고 탓을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를 용서하고 용납하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용서라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이죠.

내가 용서했지만 용서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옛말에,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있잖아요.

용서를 구해도 용서해야 완성이듯이, 용서를 해도 용서를 받은 이가 인정해야 용서가 힘을 발휘하죠.


16절을 보죠.

16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두세 증인의 입을 빌어서 확정지으려는 것이다. 


이 말씀 또한 세력화해서 찾아가 죄를 지은 사람을 윽박지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분쟁이나 죄에 있어서 주체는 분명 두 사람입니다.

그러나 화해에 있어서는 주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오해를 풀어주는 이웃이 존재해야 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제3자가 필요하죠.

저는 결혼하는 친구들에게 꼭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하니까 서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못하는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사랑하기 때문에 못하는 말이 생기고, 오해도 생깁니다.

그래서 주위에 꼭 두 사람의 권위자를 이웃으로 두라고 권면합니다.

두 사람이 다 인정하고, 따를 수 있는 이웃이 필요하다고 말하죠.

위험하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서로의 입장과 오해를 풀어주고 해결해줄 지혜자가 필요해요.

그런 말 있잖아요.

아무리 잉꼬부부여도 옆에서 일주일만 수고하면 갈라서게 할 수 있다고요.

주위의 조언과 도움은 정말 필요합니다.

특별히 주위에 지혜로운 이웃을 두는 것은 정말 축복이죠.

이 말씀은 다음 구절에서 더 구체화됩니다.


17    그러나 그 형제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여라.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 사람이나 세리와 같이 여겨라."


이 또한, 교회에 까발려서 창피를 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교회 공동체가 나서서 용서와 화해의 모범이 되라는 말씀이죠.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는 가치관과 하나님의 뜻을 향해 갑니다.

그것이 공동체적 진리이죠.

우리는 때론 이기적이고, 때론 욕망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설 때, 그 때 우리는 다시 새로운 마음과 다짐을 하게되죠.

공동체로 인해 우리의 갈 방향을 다시 잡고, 삐뚤어진 것을 치리 받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방향성과 유용성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바로 화해의 자리, 용서의 자리, 하나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죠.

교회가 있는 이유, 우리가 모이는 이유, 그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화해를 이루고, 용서와 용납을 이루고, 겸손히 하나의 공동체가 되겠다는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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