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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성경본문올바로읽기] 눈에는 , 이에는 

 


 

출애굽기21:23    그러나  여자가 다쳤으면, 가해자에게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1.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

영어를 배우는데 가장 적절한 시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언어를 배우는데 어린 나이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실 겁니다.

일찍 영어를 배울수록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죠.

미국에 있는 한은성전도사님의  소율이가 학교에 갔습니다.

그렇게 영어를 하기 싫어하던 소율이가 이제는 엄마 발음을 교정해 준데요.

학습능력으로 보면 어른이 훨씬 빠를  같은데 어린아이들이 빠른  보면 언어는 역시 어릴 때죠.

 

그런데 저는  의견에 의문이 있습니다.

어릴 적의 언어습관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교육이 필요한 것은 맞습니다.

근데 그것은 모국어일 경우이지요.

타국어일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많은 분들이 영어를 일찍 배워야 하는 이유로 발음을 듭니다.

어린 시절에 배워야 발음이 정확하다는 것이죠.

그런데요.

발음이라는 것이 본래 신체구조나 구강구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거든요.

어린 시절, 아니 그곳에서 태어나도 발음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찬사가 있습니다.

발음이 모국어인(네이티브) 수준이다.”

그런데  말이 진짜 찬사일까요?

그것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 뿐입니다.

현지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이런 찬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말하면,  찬사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찬사인 것이죠.

그러니까 잘하네?” 정도의 수준인 겁니다.

정말 잘해도 모국어인의 눈에는 그냥 외국인일 뿐입니다.

 

제가 대학을 들어갔을  외국인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박대인교수님이라는 분인데요.

이분이 저보다 우리말을  잘하시는  있죠?

우리말 어휘가 제가 모르는 단어를 쓰고, 표현을  만큼 훌륭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가 1965 생인데요.

박교수님이 한국에 오신 것이 1961년이에요.

저보다 한국에 오래 사신 것이죠.

오리엔테이션  미국에서 20년을 살다가 오신 한국인 교수님과 함께 하셨는데요.

박교수님이 그분에게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하고,

그분은 박교수님에게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박교수님이 발음이 좋으셨느냐?

아닙니다.

그냥 외국인이었어요.

그러나 누구도 그분의 발음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의 말씀의 내용과, 표현의 수준을 생각할 뿐이었죠.

 

유학을 생각하고, 자녀들을 공부시키려는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어요.

아이들이 발음이 나빠서 무시를 당하거나 성적이  되는  알아요.

천만에요.

오히려 발음이 너무 좋으면 그게 이상한 거죠.

외국인이 여러분에게 정말 한국인 같은 발음으로 말하면 어떠시겠어요?

 

암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가 하려고 했던 말은  어린이들이 외국어 습득이 빠른가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능력이 있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언어능력의 나이를 말하지만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아요.

어른들은 그러면 그런 언어 습득 능력이 떨어지느냐?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제는, ‘방해입니다.

어른들은 이미 아는 것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아는 것이 언어 학습에 방해를 하죠.

아이들은 쉽게 물어보고, 쉽게 답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생각할 것이 많죠.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니까요.

여러가지 상황들을 알기 때문에 쉽게 묻지도, 쉽게 대답하지도 못하죠.

더 큰 문제는 그 아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머리에 진리가 자리잡으면 쉽게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 들어와도 그것을 거부하죠.

그것이 방해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구현하시죠?

그런데 그 정의가 무엇입니까?

막연한 질문이기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여러분을 해치고 고난에 빠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혹은 국가 때문에 가정이 산산이 깨지고 억울한 아픔이 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정의를 사용하실까요?

불의한 일은 깨지고, 선하고 착한 이들은 세워지는 정의가 이루어져야겠죠?

그것이 권선징악인데요.

우리는 정의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의 정의가 권선징악일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심란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하나님의 정의가 권선징악입니까?

예수님께서 죄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을 멸망하고 기독교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일을 벌어지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없는 것입니까?

만약 하나님의 정의가 용서라면요? 사랑이라면요?

근데 우리의 머리에 정의는 권선징악이니까 하나님의 정의도 그렇게 바라보죠.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권선징악의 눈으로 보려고 하죠.

우리 머리에 이미 박혀있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죠.

그것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 저의 사고구조가 남과 좀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련할 정도로 남에 대한 생각을 하죠.

물론 이기심이 저변에 깔려 있어서 남들과 다를 바 없지만 비교적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그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던 거죠.

여기 있는 분들 가운데 제가 여러분들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는 분 계실걸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꿈꾸고, 고민하고 하죠.

그것이 저는 기도라고 여깁니다.

기도가 그냥 어떻게 해 주세요가 아니고요.

그분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어떤 문제가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죠.

그래야 하나님께 할 말이 생기잖아요.

성경에 생각과 고민으로 뼈가 싹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저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저 저를 보통의 목사로 보죠.

그러면 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심한 간섭과 도전으로 생각하거나, 부담스러워하죠.

보통의 사람,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을 가지고 보니까 그런 거죠.

사랑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저 사랑은 내가 너를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지 않을 거야이거죠.

어떤 사회적 편견이나 평가로 너를 판단하지 않을거야.

이것이 사랑이에요.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광야를 주셨다고요.

그 광야가 바로 그 내 머리에 박혀있는 진리를 버리는 것이라고요.

혹은 내 머리에 있는 상처들을 버리는 것이라고요.

그래야 새로운 진리를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사랑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죠.

 

2. 눈에는 눈으로..

오늘 본문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잘 알려진 말씀이죠.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예수님 당시에도 잘 알려진 말씀이었죠.

왜 그때나 지금이나 잘 알려진 말씀인고 하니 이것이 권선징악과 연결되기 때문이죠.

통쾌하고 시원하지 않습니까?

똑같이 해 주는 것처럼 시원한 건 없죠.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되뇌이는 말이 있죠.

너도 너 같은 딸, 아들 낳아봐라.

언제나 무슨 일을 당할 때 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되뇌이죠.

너도 당해 봐.

우리 내면에는 이런 복수심이 늘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복수심에 합당한 말씀이 성경에 적혀있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이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를 원했죠.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곡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말씀을 가깝게 읽는다면 이 말씀의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해석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존재하는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 방해가 바로 가장 큰 신앙의 걸림돌이죠.

그렇다면 말씀을 읽어봐야 겠죠.

출애굽기21장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백성들을 다스릴 수단으로 주신 율법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공동체 삶의 규약과 같은 법들이 적혀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폭행을 했을 경우에 관한 법률입니다.

12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12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13    만일 사람이 고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손에 넘긴 것이면 내가 그를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14    사람이 그의 이웃을 고의로 죽였으면 너는 그를 내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15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6    사람을 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8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의 상대방을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19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걸으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그간의 손해를 배상하고 그가 완치되게 할 것이니라20    사람이 매로 그 남종이나 여종을 쳐서 당장에 죽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으려니와21    그가 하루나 이틀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재산임이라22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여기까지 각종 문제를 일으켰을 경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오늘 본문이에요.

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25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으셨어요?

여러분이 생각하던 그런 내용이 아니지 않나요?

우리는 이 구절이 당한대로 갚아주라는 의미로 이해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읽을 때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조금 더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이미 해를 주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해결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를 일으켰다면 그 문제로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혹은 그 다친 사람을 치유하고 보호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뭘까요?

 

하나님은 사람의 죄성을 익히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로 그치지 않습니다.

가령,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자는 자신의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배가 고파 사냥을 시작했어 배가 부르고 나면 이제는 취미로 사냥을 합니다.

누군가에 피해를 당했다면 갚아준 것으로, 사죄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우려먹습니다.

한번 죄인은 평생 죄인입니다.

빵을 훔쳐 감옥에서 실형을 받은 사람은 죄값을 치르고도 늘 죄인입니다.

물론 어찌 감옥살이로 그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사람들은 용서를 모르죠.

한번 실수한 문제에도 거듭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사회적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문제를 지금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잘못 했다

죄를 지은 것은 문제 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해 그보다 더 심한 보복은 하지 말아라

생명은 생명보다 갚아야 하지만 더한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

눈에는 눈으로만 그쳐라더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요지입니다.

어떤가요?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3. 나의 율법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사랑이다

예수님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의 말씀입니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이 말씀에 관한 강해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 복수에 대한 마음들이 컸습니다.

특별히 유대인은 선민사상이 있는 민족인데요.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언젠가 하나님이 백마탄 왕자님처럼 오셔서 로마를 멸하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메시아사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어코 복수를 할거야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지하운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죠.

오른 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 말씀은 상당히 심리학적인 말씀입니다.

내 오른뺨을 맞으려면 어떤 손으로 쳐야 할까요?

상대는 왼손으로 쳐야 합니다.

물론 왼손으로 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노예들은 오른 뺨을 많이 맞았는데요.

왜냐하면 주인이 오른 손의 손등으로 노예의 뺨을 쳤기 때문입니다.

이는 심한 상해를 주는 체벌은 아닙니다.

다만 상당한 모욕감을 주는 행동입니다.

주인들은 일부러 그랬습니다.

너는 나보다 낮은 존재임을 잊지마

 

우리 가운데도 말이나 행동으로 모욕을 주는 경우가 있죠.

아니 모욕을 주는 사람보다 모욕을 받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툭하면 상처받죠.

상처라는 것이 모욕감에서 시작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모욕감 앞에 예수님은 왼쪽 뺨도 대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모욕감을 모욕감으로 받지 말라는 말이죠.

아이들 놀릴 때, 보통 에구바보이렇게 놀리죠.

그러면 아이들은 울고불고 합니다.

모욕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바보라는 소리에, ‘맞아내가 좀 바보같애라고 받는다면 어떨까요?

모욕감을 깨는 방법은 모욕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상처를 주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으로 강제하지 못합니다.

다만 작은 행동으로 상대방의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죠.

상처 받는 사람은 상대가 때려서 아픈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처를 키우기에 아픈 거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오리를 가라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도 기억하시죠?

강제로 자신을 쓰고 버리는 압제자의 의도를 분쇄하는 방법은 자발적입니다.

로마군인들의 이런 수법은 자신의 우월감을 나타내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들은 유대인들이 싫은 티를 내주고, 저항하고 하면 더 신나죠.

왜냐면 그 때 자신들의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속옷과 겉옷의 문제는 더 오묘합니다.

보통 겉옷은 벗어줘도 될 것 같지만 당시 유대 문화는 달랐어요.

속옷이라는 것이 우리들의 속옷이 아니고요.

일상의 옷입니다.

왜 속옷을 달라고 하냐면 사람들은 속에 입는 옷을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요.

그러나 겉옷은 다릅니다.

겉옷은 단순한 겉옷이 아니고, 밤에는 이불이 되기도 했고요.

낮에는 해를 막아주는 방패가 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겉옷은 돈으로의 값어치도 있는 값진 것이었어요.

예수님은 지금 작은 것을 달라고 하면 더 큰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죠.

누군가 작은 것을 바라면, 더 큰 것을 주세요.

조금이라도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에 대한 내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세요.

그래야 괴롭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는 복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더 크게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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