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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성경본문올바로읽기 7]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잠언29:18,

계시가 없으면 백성은 방자해지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1. 성경번역은 생각보다 어렵다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5장에 언급된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유명하죠.

이와 더불어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는 디모데후서3:16이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이것을 [축자영감설 逐字靈感說]이라고 하는데요.

뜻은 한 단어 한 단어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에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무오설축자영감설은 근본주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는데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되었다는 부분을 결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은 많은 논란과 분열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가 초대교회라고 말하는 교회는 현재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입니다.

혹시 이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스러운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교는 가톨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가톨릭에서 개신교회가 종교개혁으로 인해 나뉜 것이고요.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어떤 분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전혀 다른 종료로 믿는 것 같아요.

마치 초대교회 당시 유대교를 보듯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을 보는 입장이랄까요?

가톨릭과 개신교의 나눔은 단순한 싸움 때문이 아닙니다.

각기 주장하는 교리들 때문인데요.

개신교회 또한 전 세계적으로 교파가 2만개가 넘습니다.

한국에서만도 300개 가까운 교파가 존재합니다.

그 중의 한 교파가 우리 감리교회이고요.

이렇게 갈라진 이유가 바로 교리 때문입니다.

, 성서에 대한 해석과 전례, 제도들에 대한 차이 때문이죠.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을 경전으로 사용하기 어렵겠지요?

그런 부분에서는 제가 보수적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번역에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성경의 원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말로 만든 성경의 원본 역시 원본이 아니라 사본들이죠.

그래서 맛소라사본, 사해사본, 이렇게 부르죠.

그러니까 이미 우리가 원본으로 여기는 것들조차 사본들입니다.

사본이라고 하면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필경이라고 하는 받아쓰는 형식의 사본이 있을 수 있고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사본이 있을 수 있죠.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적혀진 말씀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사본이 필요했습니다.

필경사들은 다른 사본들을 일일이 받아 적었습니다.

그런데 적다보면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죠.

때론 잘못 적기도 하고, 때론 바꿔 적기도 하죠.

저는 누군가의 말을 받아서 적을 때 들은 말과 적는 말이 다를 때도 있습니다.

분명 생각은 이 단어를 생각했는데 내 손은 다른 단어를 적는 경우입니다.

암튼 이런 과정이 한 번도 아니고 연속된다면 오류가 100%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나무껍질인 파피루스에 적은 사본을 보고 적는데 사본이 뜯어져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적는 필경사가 유추해서 적는 경우도 있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죠.

성경에 보면 절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바로 사본이 훼손되어서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죠.

 

번역은 또 어떻겠습니까?

번역을 해 보신 분은 아실 겁니다.

단편적 질문입니다만 한글 책을 영어로 번역을 잘하려면 한국인이 좋을까요? 미국인이 좋을까요?

이런 질문이 더 좋겠네요.

한국말을 잘 하는 사람이 제격일까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제격일까요?

물론 둘 다 잘해야 합니다만 영어책으로 번역하려면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하죠.

그래서 한국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외국인이기도 하죠.

반대의 경우 또한 정 반대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유는 뉘앙스의 표현 때문이지요.

자신의 경험과 어휘능력이 그 번역에 지극히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분명합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죠?

문과생과 이과생이 같은 단어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예들 말이죠.

영어에 probability 저 같은 문과생은 개연성이라고 번역하지만 이과생들은 대부분 확률로 번역할 겁니다.

차별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있어요.

differentiation인데요.

아마도 이 단어를 보면 이과생들은 미분으로 생각할 테지요.

function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것이 기능이라는 뜻인데, 어떤 이에게는 함수가 되죠.

하긴 낱말이어 맞추기에서 눈이 녹으면?” 했더니 문과생은 봄이 온다고 하고, 이과생은 물이 된다고 했다더군요.

 

번역이 힘들 듯이 성경번역은 더욱 힘이 듭니다.

단어의 뜻이 많고, 그 배경과 사회현상을 알아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인데요.

더욱이 고대의 풍습과 환경을 알지 못하면 따라잡기도 힘들죠.

설사 이해를 했다손 치더라도 함부로 단어를 의역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2. 진정한 비전이란

또 한 가지의 번역 상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언어가 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죠.

가령, 우리말에 어엿브다라는 말이 있었는데요.

그 말의 본래 뜻은 불쌍하다는 뜻이었지만 지금은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 손이 필요하다는 말에서 손은 단순한 신체의 손이었지만 지금은 노동력을 뜻하는 말이 되었죠.

이렇게 단어의 의미가 확대 되거나 혹은 축소, 또한 전혀 다른 의미로의 변화가 있죠.

 

오늘 본문은 그런 의미 변화에 따른 문제를 야기 시키는 부분입니다.

오늘 새번역에서 계시라고 된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묵시라고 번역되었었습니다.

보통 요한계시록, 혹은 요한묵시록이라고 하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런 개념으로 번역한 것이죠.

원어인 히브리어 단어는 하존이라고 하는데요.

히브리어 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보니까 비전이라고 적혀 있어요.

오랜 영어성경번역본 가운데 킹제임스버전이라는 번역본이 있습니다.

이 번역본에서는 계시를 VISION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비전을 품으라고 설교를 하죠.

비전이 없는 백성은 방자해진다고요.

이 설명은 원어에 근거한 100% 맞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사전에서 설명한 비전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비전이 조금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변한 단어인 셈입니다.

 

비전이라는 단어의 뜻은 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이 비전이라는 단어를 현대에서는 많이 씁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비전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해요.

비전 2020, 이런 단어와 표어들이 많이 쓰이죠.

이때 쓰이는 비전은 한 마디로 목표를 뜻하는 것입니다.

2020년까지 설정한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을 비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비전을 꿈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꿈이라는 것이 자신의 소망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이죠.

자신이 꿈꾸던 일들, 자신이 바라던 일들이 소망으로 담겨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비전 뭐시기 하는 말은 내 꿈을 펼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꿈이 없으면 분명 나태해집니다.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일 때가 많죠.

그래서 삶의 목표를 정하고,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본래 이 비전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비전이라는 말은 이루고자하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존이라는 히브리어가 뜻하는 비전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한번 이런 말로 생각해 보시죠.

너의 꿈을 이루어라

이 말을 여러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아마도 대부분 네가 바라는 목표를 이루어라는 말로 받아들이시겠죠?

그런데 만약 그 꿈을 꾸는 주체가 다르다면 어떨까요?

꿈을 누군가가 주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너의 꿈을 이루라는 말은 어떤 말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창조물이죠.

그런데 왜 창조하셨을까요?

계속적인 우문에 당황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역으로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창조했다고 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어떤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기에 적절한 예는 아닙니다만 단적인 표현이니 이해해주시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심심풀이로 그 발명품을 만들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 물건은 이렇게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만드시겠죠?

그것이 창조물이죠.

창조물에는 각각의 창조자의 목적과 쓰임새가 있습니다.

이것을 꿈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의 꿈은 누가 꾸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꿈은 누구의 것이죠?

또한 우리가 이루어야할 꿈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꿈을 볼 줄 아는 것이 비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비전이 아니에요.

만약 이것이 비전이라면 모두 다 높은 자리, 훌륭한 자리를 꿈꾸겠죠.

그러나 우리의 비전은 하나님이 생각하신 적절한 쓰임새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고, 우리에게 품으시는 꿈이시죠.

그것을 보는 것이 비전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높은 자리던 낮은 자리던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오직 온전하고 가장 귀한 비전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이렇게 말하죠.

딤후2:20~21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비전은 내가 원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비전을 세운다고 하죠?

그런데 뭘 세우나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는 것을 비전이라고 생각하죠.

세상은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비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비전은 나를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볼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지, 바라시는지를 아는 것이죠.

그것이 온전한 비전입니다.

 

3 통찰의 능력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비전에 대한 어원을 알아보았습니다.

어원을 찾아 공부하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영어의 비전은 라틴어 visionem 원시 인도유럽어 weid에서 온 말이라네요.

그런데 비지오넴의 뜻은 보다”(to see)이고, 웨이드의 뜻은 “+알다”(I know)랍니다.

여기에 더 깊이 들어가면 유라시아의 조상어인 세소토어에도 어원이 있다는데요.

그것이 “boithutelo”라네요.

그런데 이 보이투텔로의 뜻이 의미심장합니다.

통찰혹은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는 거죠.

이 뜻을 조금 더 설명하면 비전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통찰하는 것전문가적인 자격을 갖추어서 머릿속에 설계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제 속에 든 생각이 있어요.

우리가 비전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비전이 있어야 해요.

바로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격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그 자격이란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자격이죠.

나의 꿈, 나의 목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꾸시는 꿈, 나를 향한 뜻, 그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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