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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경본문올바로읽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도행전2: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1. 세례와 침례

개신교에서는 동일한 성경을 사용합니다.

다르다면 번역본이 다른 것입니다.

참고로 여호와증인도 경전으로 동일한 성경을 사용합니다.

다만 자신들만의 새로운 번역본을 사용하죠.

그것을 신세계역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다른 성경을 사용하는 이단도 있습니다.

몰몬경이 대표적인 것인데요.

보통 몰몬교라고 하지만, 그들의 정확한 교단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입니다.

미국 유타주에서 시작해서 그곳이 곧 성지이고요.

우리에게는 정장을 입은 미국 청년들이 영어교육을 하겠다고 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죠.

유타주의 몰몬교도들은 학생시절 일 년 동안 선교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방송인으로 유명한 로버트 할리 변호사가 몰몬교 성도죠.

물론 이 교단에서는 성경도 사용하지만 자신들의 새로운 성경인 몰몬경을 주로 사용하죠.

몰몬경은 몰몬교 창시자인 조셉 스미스가 모세처럼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고 하죠.

 

아무튼 이들을 제외하고는 동일한 성경을 씁니다.

그런데 어떤 번역본이든 상관없이 특정한 단어에 대해 다르게 쓰는 교단이 있는데요.

그 교단은 침례교단입니다.

또한 특정하게 다른 단어는 침례라는 단어죠.

우리는 보통 세례라고 번역해서 사용하지만 침례교단의 성경은 세례가 아닌 침례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침례교단의 성경에는 세례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죠.

개신교는 아니지만 카톨릭에서도 같은 성경을 사용합니다만 특정한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죠.

그것이 하느님인데요.

개신교에서 부르는 하나님과 달리 카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죠.

하느님의 뜻은 순 우리말, 하늘에서 따온 말로,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의미인데요.

간혹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로 소모적인 논쟁을 하는 것을 볼 때가 있어요.

사실은 카톨릭에서는 1970년대까지 하느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호칭은 천주님이었죠.

그러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성경번역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같은 성경을 사용하는데 다른 번역본으로 쓰는 것보다 함께 신학적인 일치를 갖자는 의미로 개신교와 카톨릭의 신학자 및 목회자들이 함께 연구를 시작한 작업이죠.

그래서 태어난 것이 [공동번역본]입니다.

이 공동번역본에서 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하느님으로 합의한 것이죠.

그런데 이것 때문에 개신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개신교에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이유는 유일하신 분, 하나뿐인 분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이 때문에 공동번역은 개신교가 파기하고 새로 번역을 해서 개정개역성경본이 나온 것이죠.

참고로 공동번역에는 66권의 성경뿐 아니라 7개의 외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세례와 침례가 뭐가 다른지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본래 세례의 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으로 그 의미를 상징했는데요.

우리가 물에 들어가면 살 수 없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세례는 침례가 맞습니다.

침례란 몸을 물에 완전히 담갔다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침례교회에는 성전에 욕조가 하나씩 있습니다.

그런데요.

정황상 물에 완전히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의식을 하기가 요즘 어렵잖아요.

그래서 약식 세례가 등장한 것인데요.

성례전에는 2가지 다 의식으로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baptism by sprinkling이라고 해서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고요.

침례는 baptism by immersion이라고 해서 완전히 몸을 담그는 것으로 진행합니다.

감리교회에서는 이 2가지를 모두 허용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죠.

 

2. 세례의 의미

우리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세례를 진행합니다.

작년 12, 성탄절에 세례를 준비했다가 하지 못한 백종길집사 막내 딸, 하나양과,

유명신권사님 어머니 진칠임님(94)의 세례도 진행됩니다.

가장 어린 하나와, 가장 연로하신 어머니의 세례가 동시에 진행되는 거죠.

이미 세례의 의미에 대해서는 모두들 아실 겁니다.

세례에는 크게 2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첫 번째 의미는 죄를 씻는 것입니다.

율법에 보면 [미크바]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것은 정결의식을 말합니다.

무엇인가 부정하고, 더러운, 즉 시체 같은 것을 만졌을 경우, 정결의식을 하는데요.

그때 온 몸을 물에 완전히 담그는 의식을 통해 정화와 회복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막에서의 동선을 보면 양의 문이라고 하는 입구를 지나면 항아리 같은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곳에는 물이 채워져 있는데요.

그것을 물두멍이라고 합니다.

그곳에서 속을 씻고, 정결의 의식을 하며 예배의 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요.

그때 베드로가 선생님께 발을 내 놓을 수는 없다고 저항을 하죠.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예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의 반응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13:8,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씻김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죠.

 

다른 의미입니다만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불려나왔을 때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생각으로 볼 때 예수를 잡을 만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사법적인 판단보다 민중의 소요나 반란에 대해 걱정을 해야 했습니다.

지난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유월절이 되면 로마의 군대를 거느리고 빌라도가 직접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어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미 이전 몇 차례의 반란을 경험했던 터라 로마인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사안이었죠.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들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27:24,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세례의 두 번째 의미는,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것이죠.

갈라디아서2:20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육신으로는 죽고, 영으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야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거듭남이라는 것을 밑동부터 없애고 다시 세우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죠.

 

거듭남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3에 처음 말씀하셨어요.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말이죠.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율법학자였던 니고데모의 첫 반응이 그러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였어요.

그런데요.

거듭남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사람의 성격, 기질 안 변합니다.

예수를 백번 믿고, 신앙체험해도 이것 안 변해요.

이 말을 곡해하지 마세요.

사람의 성격이나 기질은 그 사람을 만든 기초에요.

그것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의 성격, 기질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죠.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성격과 기질이 아니라 그 성격과 기질에 붙어있는 다른 가치들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격이라고 부르죠.

 

가령, 이렇게 예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격이 아주 급한 사람이 있어요.

조금 과하게 말해서, 다혈질에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경쟁, 비교, 혹은 성과라는 가치가 붙으면 그 사람은 사람도 죽입니다.

그런데 긍휼과 사랑이 붙으면 그는 친구를 위해 목숨도 내놓는 사람이 되죠.

반대의 성격인 조용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억압과 겁박이 있으면, 우물쭈물 우유부단의 극치를 달리지만,

주어진 책임이 있으면 소리 없이 차분하게 그 일을 해 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것은 성격과 기질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보통 인격을 , , , 3가지 요소로 말하죠.

지식, 감정, 의지를 말하죠.

진리가 지식 안에 들어오면 지적 가치관이 바뀌죠.

감정과 판단이 바뀌고, 이루려는 뜻이 변화합니다.

가령, 돈이 그 인격을 지배하면, 모든 머리는 돈과 관련되어 계산하게 됩니다.

국어를 배우든, 영어를 배우든, 그 머리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을 잡하게 되죠.

감정 또한 돈에 의해 흔들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뜻도 돈이 되고요.

그런 인격을 성격대로, 기질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인격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가 거듭남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다시 기억해 보세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왜 찾아왔는지 아세요?

아니, 니고데모가 무엇이 궁금해서 찾아왔는지 아시나요?

성경을 찾아서 읽어보죠.

요한복음31~3절까지입니다.

어떻습니까?

니고데모가 뭘 알고 싶어서 찾아왔죠?

그의 질문은 없고 마치 독백 같은 예수님에 대한 품평만 있을 뿐이에요.

거듭남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마침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니고데모가 와서 선뜻 꺼내신 것일까요?

천만에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니고데모의 자기 독백과 같은 말에 있어요.

그가 한 말을 보시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표징이 아니다라는 말씀이죠.

듣기 좋은 칭찬입니다.

저도 이런 칭찬 듣고 싶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거듭남을 말씀하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어제 다른교회에서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교회에도 다문화학교를 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그들을 돕는 방법을 상의하려고 오셨어요.

예의바르신 목사님께서 다림교육에 대한 칭찬을 하시더라고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그것을 배우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좀 우쭐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하면 교회가 이웃을 도와줘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묻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교회가 이웃을 도울 방법으로 다림의 모습이 좋아보였다는 것이죠.

저는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여서, 혹은 남을 돕는 목적으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마침 왜 이 일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나도 폼 나게 교회니까, 믿는 사람이니까, 이웃을 도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냥 이웃이 되어주기로 했다... 우리가 더 나아서가 아니라 같이 어깨동무하기로 한 거다.”

 

이게 참 미묘한 차이인데... 여러분에게 이걸 설명할 시간은 오늘 없고요.

예수님의 말씀을 빗대면, 니고데모의 칭찬이 칭찬이 아니었던 것이죠.

그가 말하는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일반적 가치로 보아 그랬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혁명의 선봉장쯤으로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특별함은 일반적 가치 안에서의 특별함인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가치관이 거듭나지 않고는 나를 볼 수 없다고요.

관점의 변화, , , 의로 대표되는 인격의 변화가 없이는 똑같은 말을 해도 의미가 다르다고요.

 

3. 믿는 자마다

! 이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15절까지 하셨어요.

그 다음 절은 뭘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한복음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왜 이 말씀이 이 대목에서 나왔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거듭남에 대한 결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읽고 보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미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그러시면서 요한복음3:16의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주셨다고요?

독생자 아들을 주셨어요.

왜 주셨다고요?

우리들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믿어야 하죠.

왜 이 말씀이 중요하냐면 거듭난다는 것이 바로 그 아들을 믿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가치가 변해요.

믿으면 감정도, 뜻도 변하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면 흔들리지 않아요.

 

오늘의 주제는 세례인데요.

왜 오늘 본문을 정했는 고하니,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여겨요.

마치 세례가 곧 구원의 전제조건인 것처럼 여기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죽기 전에 꼭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세례 안 받으면 구원도 없는 것처럼 여겨요.

오늘 말씀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기 충분한 오해의 소지가 있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분의 말씀을 믿으면 가치관이 변한다는 사실도요.

 

방언한다고 신앙이 깊어지는 것 아니에요.

이적을 베푼다고 영성이 높은 것도 아니에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거듭나요.

오직 믿음이 나의 인격을 바꾸고, 나의 뜻도 바꿔요.

믿으면 걸어가요.

믿으면 행해요.

 

그런데 왜 세례를 받는가?

이것은 왜 방언이 필요한가와 같은 이치에요.

왜 방언이 필요했느냐면 그 마음에 확신과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죠.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이런 마음 많이 갖죠.

어떤 사인이 오면 그 일은 하는 것으로 여겨야지....

상민이 고등학교 보낼 때 간증이에요.

상민이가 한 번도 믿음의 친구들과 신앙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어요.

그러다 중국학교 소식을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의 형편으로는 그곳에 보낼 수가 없었어요.

신청해야 할 날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게 다가오는데 확신이 생기지 않았어요.

우리교회에서 목사인 제가 믿음이 제일 약해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일주일 안에 서로 다른 사람에게서 이 만방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면 모든 걱정을 뒤로 한 채 보내겠습니다.”

놀랍게도 금요일까지 각기 다른 분들에게서 만방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요.

친구들을 통해, 가족들의 뜬금없는 전화를 통해 듣게 된 이야기가 무려, 9번이었어요.

한번 남았는데 마지막 날 토요일 저녁입니다.

그날은 아무도 안 만나는 날인데, 오래전 약속 되었던 옛 교회 집사님 가족과 저녁약속이 있었어요.

그들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고 마치려는데, 그 집사님이 이렇게 말해요.

목사님, 혹시 그 학교에 대해 들어보셨어요?”

그렇게 열 번이 채워졌고요.

무작정 상민이를 보냈습니다.

 

그 방법이 진리는 아니에요.

그러나 확신이 필요하고,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인인 것은 확실하죠.

저는 여러분이 이런 방법을 통해 확신을 갖기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확신을 갖기 원해요.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산 제물이라는 것을 몸에 새기고 사는 거에요.

나는 세례 받은 사람이다.”라는 증표를 달고 사는 사람 말이죠.

여러분이 뱃지 같은 것 달아보신 적 있으시죠?

나는 국회의원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그것 뿐입니다.

그 뱃지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죠.

다만 그 뱃지가 나의 태도를 정하게 하긴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나길 바래요.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여러분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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