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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성경본문올바로읽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1. 모든 일이 선하게 돌아가는가?

어제 심방을 했는데요. 거기서 가슴이 저미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은 선하십니까? 왜 나에게는 가면 갈수록 선한 인도하심이 안 보일까요?”

 

그분의 말이 이해가 될 만큼 인간적인 말로 참 안 풀리는 인생임을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어려서부터 여러 가지 압박에서 살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삶이었습니다. 주위에서 보면 참 재능 많고, 가진 것 많은 사람인데요. 그 내면에는 아픔과 슬픔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분이에요. 본인의 입으로 행복하다는 마음을 한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늘 아픔 속에 지냈데요. 신앙적으로는 늘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을 주시는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혔고요.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하려고만 했던 그런 분이었어요. 그래도 굳건하게 잘 견뎌왔고, 더 나은 삶을 꿈꿨는데 그마저 좌절되는 것 같은 순간이 온 거죠. 이런 분에게 참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행복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실체가 아닙니다. 얼마만큼을 얻어야 행복하다는 기준이 없잖아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행복을 느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이들도 있죠. 행복은 객관적 기준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실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쟁취하는 것이라는 뜻이죠. 쟁취라는 말이 과격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마디로 내 안의 만족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영적으로 가난할수록 행복합니다. 그래서 낮은 마음을 가질수록 행복하게 되죠. 성공이라는 목표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목표, 즉 성공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행복감이 달라집니다. 어제, 다림교육 멘토링 리더들을 만났는데요. 다림교육에서 멘토링을 해왔던 학생들 중에 계속적으로 교류를 가질 대표자들입니다. 이들과 앞으로 더욱 긴밀한 교제를 하면서 아름다운 꿈을 꿔보려고 해요. 그 친구들에게 어제 그런 말을 했어요.

 

“너희가 너희 위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성공을 생각하면 불행해 진다. 정말 중요한 성공은 내가 쓰임 받을 자리를 보고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제가 한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다리교육 멘토 가운데 너무 이쁜 마음을 가진 멘토가 있었는데요. 고2때까지 멘토링을 잘 해 주었고, 다림에 와서 봉사하면서 자신의 꿈을 교사로 정한 친구였어요. 그런데 고3이 되어서 만난 그 친구는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친구가 되었어요. 이쁜 미소도 사라지고, 표정도 너무 어두어진 거예요. 그 이유를 보니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였습니다. 갑자기 가정이 이혼을 하고, 어머니가 힘겹게 벌어 딸을 키우고 있었는데요. 어머니는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월급이 200만원인데, 자기반 친구 중에는 사교육만으로 매월 400만원을 쓰는 친구가 있는거죠. 그것을 보고 이 친구가 자괴감에 빠진 겁니다. 그리고 그의 목표도 달라졌어요.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의대에 가겠답니다. 의대 좋죠. 의사가 되어서 좋은 의술로 생명을 살리면 좋잖아요. 그런데 의대를 가겠다는 이유가 ‘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자신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목표를 정하고도 행복하지 않은 거죠.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자신의 처지가 더 불행해 보이는 겁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쓰일 자리가 아니라 나보다 나은 자리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죠.

 

2.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어제 그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로마서8:28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침 오늘 본문이기도 하죠.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는 이 말씀 많이 좋아하죠. 이 말씀을 읽노라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선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해요.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께서 선하게 이끄실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좀 의외로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모두 힘을 얻고 언젠가는 분명 선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말씀을 분석해보면 이 말씀이 적용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이해를 돕기 위해 이 말씀의 다른 번역을 읽어보겠습니다. 성경을 조금 쉽게 적어놓은 번역본인 쉬운성경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로마서8:28,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쉬운성경본)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는 특정한 분류의 사람이 적시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이죠. 이 말씀은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향해 선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제자와 자녀를 구분해서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 구분은 명칭으로 인한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바에 기초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는 자들이건 믿지 않는 자들이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자녀들 가운데 자신의 뜻을 이 땅에 이룰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들이 예배자들이고, 그들이 제자들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요한복음1:12,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 그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이 곧 제자들입니다. 물론 맞아들인다는 의미는 그분의 생각과 뜻을 마음의 중심에 놓는다는 뜻입니다. 결코 교회를 다닌다고 그분의 생각과 뜻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주님의 것으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제자들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헛갈리는 것인데요.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말이 바로 제자로서의 권세입니다. 그 부분에서는 여러 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다 아실 겁니다. 다만 오늘의 본문은 일반적인 주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특정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도 않고, 일하지도 않으면서 선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의 약속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제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무나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언급하기 전에 자신이 이 말씀의 적용대상이 되는지 알아야 하죠. 조금 더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범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한정됩니다. 나의 욕심이나 이기심, 혹은 아무 일에 이 말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사용하지 마세요.

 

3. 선을 이룬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주님과 협력해서 이루게 될 선은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선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선을 바라세요? 그 선이 성공일까요? 아니면 건강? 경제적인 안정? 혹은 개인적인 행복을 의미하는 것일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큰 이의가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소위 불행한 결말을 보는 이들을 저는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귀한 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는 이들을 보았기 때문이죠. 멀리가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존경에 마지않았던 찬송시인이자 작곡가인 케이시 그린은 찬양사역을 하러 가던 중에 항공기 사고를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영향을 준 영성가 헨리 나우엔도 뜻밖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존경하는 감리교 선배이셨던 채희동목사님도 새벽기도 인도 위해 나왔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이런 경우를 보면 결코 주님의 선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오늘의 본문 다음 구절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로마서8:29,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오해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선을 우리 나름대로 해석하기 때문이죠. 그것을 우리의 편의대로, 우리의 뜻과 마음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일, 나의 유익, 나의 잘됨에 하나님의 선을 대비시키죠. 그러나 오늘 본문은 조금만 더 읽어도 그 오해는 해결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을 바울은 29절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바울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 살아가는 것인 것이죠. 하나님의 선은 성공과 실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이 자신의 마음과 뜻을 품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선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선이죠.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허망하고 억울한 일이 일어나고 문제가 발행하고,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생깁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이런 일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선은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죠.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죠.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지만 누구도 주님을 환영하거나 칭송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주하고 버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나설 때 환영을 받기는커녕 모함과 억울한 누명을 쓸 때가 많습니다. 박수 받는 것은 차치하고 오히려 공격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길을 걸어가시고 결국에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억울함을 씻기는 일도, 누명을 벗기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박수 받도록 조정하는 일도, 공격받지 않게 막아주는 일도 아닙니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오직 주님이 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용기를 주시죠. 어려움을 막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이기는 힘을 주시죠. 그래야 종국에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또한 주님의 뜻하신 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4. 우리의 용서와 은혜로 이루어지는 선

짐 엘리엇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아시는 분이 계시죠? 제가 설교를 통해서도 언급한 바 있는데요. 에콰도르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떠났던 짐 엘리엇을 비롯한 선교사 5명이 선교지에 도착해서 제대로 선교일정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루고자 했던 꿈은 산산조각되었죠. 이 사건만 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신 선은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이 에콰도르 땅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죠.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한국 땅에도 선교사 한 명이 배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의 품에는 한글로 된 쪽 복음 성경이 하나 있었어요. 그는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할 거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어요. 그가 탄 배는 대동강 기슭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다급한 마음에 강에 뛰어들어 헤엄을 쳐 겨우 조선 땅을 밟았죠. 그러나 헐떡이던 숨을 고르기도 전에 그의 눈 앞에 보인 것은 날카로운 창 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창은 어느새 그의 심장을 관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품고 그렇게 그리던 조선 땅에 와서 그는 복음은커녕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품에 있던 쪽 복음을 꺼내 손에 쥔 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이 선을 이루시는가에 의문이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의 과정을 잘 알고 있죠. 처참하게 죽은 짐 엘리엇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남편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에콰도르로 향했습니다. 남편을 죽였던 아우카 인디언의 언어를 배웠고, 또 그들 마을로 들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했죠. 그녀에 의해 주님을 영접한 사람 중에는 남편을 직접 죽인 이들도 있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러진 그의 손에 들린 쪽 복음을 누군가 집어 들었고, 그는 그것을 집에 가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집을 교회로 세웠고, 그 교회는 평양 대 부흥 운동을 이끌었죠. 토마스가 죽어가는 장면을 구경했던 이는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요. 여러분, 그 큰 희생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우카 인디언에 대한 선교뿐이었습니다. 수년간 꿔왔던 부푼 꿈을 가지고 조선 땅에 왔던 그 젊은 청년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선은 무언가요? 그저 조선 땅에 심겨지는 그리스도의 말씀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이에요. 선교사들의, 제자들의 놀라운 입신양명이 아니고요. 그런데 제가 마지막으로 꼭 집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것은 협력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과 우리의 협력이죠. 아마도 엘리엇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 복수였다면 아마 이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복수였다면 우리도 존재하지 않았겠죠? 놀라운 것은 그 처참하고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들의 반응이 용서와 은혜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그런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도 자신이 동원해야할 것이 복수가 아니라 은혜와 용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그들의 형상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눔을 통해 하나님의 공평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아시죠? 그런데 하나님의 선 또한 우리들의 용서와 용납, 이해와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끝없는 공격과 조롱 속에서도, 죽음의 공포와 협박 속에서도 용서와 은혜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분 혼자 일하시지 않으시죠. 그것이 제자를 찾는, 예배자를 찾는 이유이기도 해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선은 우리들의 용서와 은혜로운 마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협력을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어렵고 힘드시죠? 나는 잘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자 하는데 오히려 구박을 받죠?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서는 단 하루도 못 살 것 같으시죠? 주님의 마음으로 살면 오히려 조롱하고, 이용하고, 업신여기죠? 그래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나도 같은 가치관을 갖고 대항하시나요? 덜 깨진 예수님 당시 제자들처럼 그들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시나요? 그들은 다 죽고, 나만 살게 해달라고, 안 믿는 이들을 다 망하고, 믿는 우리만 잘 되게 해달라고 주문하시나요? 그런데 거기에는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은 그분의 마음과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 마음이 협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용서와 은혜로움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길 원하신다면.... 용서하세요... 용납하고 은혜를 베푸세요. 믿는 이들이던, 믿지 않는 이들이던... 나보다 못 사는 사람이든, (내 은혜가 필요 없을 만큼) 더 잘 사는 사람이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상관하지 말고 용서하고 용납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대로 가세요. 거기에 주님의 선하심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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