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묵상일기 211 -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때로 내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2026. 6. 12. 05:00묵상하는말씀/사도행전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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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22b~24   그러자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그들을 매로 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이 명령을 받은 부하들이 그들에게 매질을 많이 한 뒤에,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그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간수는 이런 명령을 받고, 그들을 깊은 감방에 가두고서, 그들의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다.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제법 큽니다. 한낮에는 덥다가도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기운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얇은 겉옷 하나 챙기시고, 따뜻한 물 한 잔으로 몸을 깨우면 좋겠습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쉽게 흔들립니다. 오늘도 자신을 잘 돌보며,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단단한 하루 보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음이 아픈 장면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좋은 일을 했습니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자유롭게 했죠.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결과는 이상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았습니다. 옷을 찢고, 매질을 한 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했죠. 깊은 감옥에 넣고 발에 차꼬까지 채웠습니다.

여기서 이상한 대비가 일어나죠. 한 사람은 풀려났는데, 바울과 실라는 묶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유를 얻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들어갔죠.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역설입니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일은 때로 나의 자유를 잠시 잃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일은 때로 내가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 될 수도 있어요.

사랑은 마음만 쓰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때로 시간과 힘과 불편을 내어 주는 일입니다. 길을 가다가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을 보신 적이 있으시죠? 그냥 지나가면 내 시간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멈춰 서서 도우려면 내 시간이 쓰입니다. 내 힘이 들어가죠. 약속에 조금 늦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도움 필요한 사람 곁에 서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부모를 돌보는 일도, 공동체를 섬기는 일도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말처럼 낭만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내 삶의 일부를 내어 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손해를 보면 곧바로 억울해합니다. 내 시간이 빼앗겼다고 느낍니다. 내 에너지가 낭비되었다고 생각하죠.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하지?" 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모든 손해가 억울한 것은 아닙니다. 성장을 위해 공부하는 시간은 손해가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수고 또한 손해가 아니죠.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는 피곤함은 낭비가 아니듯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감당하는 불편은 실패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잠시 미루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투자입니다.

사명에는 불편이 따릅니다.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공동체를 섬기기 때문에 마음 쓸 일이 생깁니다. 일을 맡았기 때문에 책임이 생깁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을 가능성도 생깁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불편을 겪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편에 서려고 하기 때문에 나도 함께 불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다는 것이 반드시 길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은 내가 누군가를 살리는 길 위에 있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걸림돌이 생겼다고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걸림돌도 많지 않습니다. 씨앗이 나무가 되려면 흙 속의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수많은 넘어짐을 지나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수고 없이 깊어지는 믿음은 없습니다. 사랑도 수고 없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사명도 대가 없이 자라지 않습니다. 실패없는 성공 또한 없습니다. 모든 성장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그 비용은 때로 시간이고, 때로 체력이고, 때로 자존심이고, 때로 불편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폭력을 미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억울함을 당해도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가장 억울한 자리에서도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복음의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억울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단순한 억울함으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생명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죽음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이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한 사람이 누군가를 살립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약함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약함은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물론 이 말이 누군가에게 계속 참고 희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강요된 희생은 복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폭력과 착취를 견디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피해야 할 폭력도 있고, 끊어 내야 할 착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의 수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감당한 불편,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하나님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겪는 불편함을 너무 억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가 맡은 일을 감당하기 위해, 더 성숙한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 겪는 수고라면 너무 주눅 들지 마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한 사람을 자유롭게 했고, 그 일 때문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감옥에서도 일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때로 내가 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손해는 하나님 안에서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선택한 수고가 은혜의 열매가 되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https://youtu.be/4SPECfk4u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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